겨울 나들이
"오늘은 우리 밖에서 놀까?"
"좋아요"
외투를 입고 현관을 나섭니다.
외투를 입는 둥 마는 둥 들고 나온 녀석,
팔이 세개인 녀석,옷을 입히며 3월의 꽃샘추위 구경을 나왔습니다.
"어디부터 갈까?"
"저쪽으로 가요"
얼굴을 할퀴는 바람에
아이들은 간지러운듯 재잘거리고
선생님의 손은 호주머니 속 깊숙히 자리를 잡는데
조그마한 손 세개가 호주머니에 경주하듯 달려 옵니다.
"선생님.. 손 잡아요"
"그럼 다른 친구들이 화낼걸?"
그러면 손을 쏙 빼곤 했었는데 오늘은 다릅니다.
"에이.. 그럼 공평하게 한 번씩 잡아주면 되잖아요"
공평하게라..
너무나 공평해서 허리병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웃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그냥 한 번 비행기 태워준 것이
공평하게라는 말에 걸려 무려 60번이나 비행기를 띄워야 했습니다.
덕분에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서는 우지끈 뚝딱 소리가 났지요.
"아니야.. 그건 공평하지 않아.."
"왜요? 한 번씩 잡아주는데도요?"
"그럼.. 선생님은 손만 잡아 주다가 아무것도 못하게 되잖아.."
"에이..그래도 선생님이잖아요.."
선생님이라는 핑게로
로보트가 되어야 하고
허수아비가 되어야 하고
모래주머니가 되어야 하고
어릿광대가 되어야 하고
달봉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희망이는
그 어떤 핑게도 없이
아이들의 친구가 됩니다.
핑게는 놀 줄 모르는 어른들이 하는 말 같습니다.
덩그라니 호박 하나가 밭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저게 뭐야?
"호박이에요"
"호박이 왜 여기에 있지?"
희망이가 호박줄기를 잡고 빙글빙글 맴을 돌리다
건너편 바위를 향해 던집니다.
"호박속에 무엇이 들었나 보자"
달려가는 아이들 사이로
환호성이 들립니다.
"선생님.. 쓰레기가 들었어요"
"호박속에 쓰레기가 어떻게 들어 갔을까?"
"아마 쓰레기를 먹고 자라서 그런가 봐요"
쓰레기를 먹고 자란 호박은 쓰레기 호박이 됩니다.
"선생님..하늘이하고 바다 보러 가요.."
"그래.."
바다가 잠든 곳으로 갑니다.
"여기에 바다가 있단다.."
"어디에요?"
아직까지 바다가 죽은지 모르는 녀석이 있습니다..
선생님과 바다이야기를 합니다.
하늘이와 함께 바다를 묻던 얘기..
하늘이가 슬퍼 울던 얘기..
그리고 바다가 아파하던 애기..
말없는 녀석들 사이로
살랑 살랑 꼬리를 흔드는 바다녀석이 보이는 듯 합니다.
"선생님.. 우리 하늘이 찾으러 가요"
"그래.."
불을 놓아 시커멓게 그을린 밭위에서
하늘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합니다.
아이들의 손길이 하늘이의 털 하나 하나를 쓰다듬어 줍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으면 배를 드러내고 누워서
배를 쓰다듬어 달라고 보채는 하늘이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누워서 하늘을 보는 시간이 많다고
하늘이라고 이름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구마가 있던 언덕밭으로 갑니다.
나무궤짝 한편으로 계단 대신 기대어 놓은 곳을 오르며
한마디씩 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야..사다리가 언제 생겼지?"
"이게 왜 사다리야?"
"이건 나무계단이야"
"아니야..나무그물이야"
사다리건 나무계단이건 나무그물이건
손으로 짚으며 발로 더듬으며 그렇게 언덕을 오릅니다.
넓다란 고구마밭에 이랑들만 덩그라니 보입니다.
"선생님 고구마 캐요"
"전에 고구마 가져 갔잖아"
"또 캐서 가져 가요"
"지금은 없어.. 그때 다 가져 갔잖아"
"아니에요.. 다시 자랐을거에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봄이 되면 꽃들이 피듯이
고구마 밭에는 언제나 고구마가 있습니다.
"선생님 배가 너무 고프다"
"그럼 가서 밥 먹어요"
"너희들 도시락 안 싸 왔잖아"
" 밥통안에 밥이 있을거에요"
부랴 부랴 주방으로 달려 온 앞에는
한 공기가 될랑 말랑한 따뜻한 밥이 있습니다.
소금절인 김에 한 움큼 싸서 입에 쏘옥 넣습니다.
따뜻한 밥과 짭짤한 소금에 입천정에 딱 달라붙는
김밥이 한 겨울 장작물에 구워먹는 고구마 맛입니다.
"선생님..왜 치사하게 혼자 먹어요? 공평하게 먹어요"
또 공평하게..
욕심꾸러기, 돼지, 치사한 선생님 소리를 들어가며
한 입에 꿀꺽 밥 한공기 뚝딱일 수도 있지만
50개도 넘는 눈이 째려보는것은 이겨낼 자신이 없습니다.
손은 김 범벅이 되었고
한 입에 꿀꺽 삼킨 녀석들
짹짹 어미새를 졸라대는 새끼 까치처럼
손에 손..손이 30개입니다.
"이제 밥 없어"
"에이.. 욕심꾸러기 선생님..돼지 선생님"
결국에는 또 듣게 되는 말입니다.
조그마한 주먹밥 하나에
덕지 덕지 입가의 김 조각들 얼굴마다
겨울 나들이 하얀 입김이 예쁘게 서립니다.
"우리 내일 또 가자"
"선생님..내일은 저 산에 가요"
"그래.. 우리 저 산 갈때는 간식을 가지고 가자.."
"좋아요..."
꽃샘추위 볼을 데워주는
아이들과의 겨울 나들이
다음은 돼지 선생님이 되지 말아야지..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