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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씨를 넘어

내 소원은




언제였지?

2학년 녀석들과

고개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법한 철망 산에 올라

연필 글씨로 꾹꾹 눌러쓴 소원을 담은 조그만 병을

누가 볼세라 황급히 묻고 내려왔던 그 때가.

얼핏 생각해 보아도 어림잡아 네 달은 된 듯합니다.

이름 하여 ‘타임캡슐! ’

 

오늘은 타임캡슐을 확인하러 가는 날!

과연 아이들 소원이 이루어졌을까

내심 기대를 안고 철망 산을 오릅니다.

낮아도 산은 산인지라

오르는 길 주변은

온통 가을 천지입니다.

가을이면 하늘이 높아져서인지

언덕 같은 산도 가을을 타서인지

덩달아 높아진 듯 생각보다 길도 가파릅니다.

 

정상에 채 오르기도 전에

정호의 숨찬 울림이 들려옵니다.

 

“ 찾았다! 찾았어! ”

 

뼈다귀 냄새를 맡은 강아지 마냥

허겁지겁 땅을 파는 녀석들의 어깨가 들썩들썩합니다.

그리고는 이내 흙투성이 손 하나가 번쩍 오릅니다.

녀석의 손에는 조그만 병 하나가 들려있습니다.

그런데 병 안에 출렁출렁 물이 고여 있습니다.

 

“ 아! 물이 들어갔다 보다! ”

 

병뚜껑을 여니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 으아~ 똥 냄새! ”

 

정말 똥 냄새 같습니다.

 

물을 따르고 안에 든 소원쪽지들을 하나, 둘 씩 집어보는데

어느 것이 누구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거나 집은 녀석들이

찢어질 세라 조심조심 펼치는데

아무리 조심해도 물에 찌든 종이는 펴지지 않습니다.

결국 고무지우개 똥 같은 모양으로 찢어지고 맙니다.

 

“ 그래도 난 소원 이루어졌는데... ”

 

한 녀석이 대뜸 말합니다.

 

“ 무슨 소원이었는데? ”

 

“ 시험 60점 아래로 맞지 않게 해 달라는 소원이었는데 이뤄졌어요. ”

 

“ 정말? 우와~ 멋지다! ”

 

“ 나도 이뤄졌어요. 난 축구 매일 하게 해 달랬는데 정말 축구 매일 했어요. ”

 

“ 그래? 잘 됐다. ”

 

“ 난 안 이뤄졌어요. ”

 

“ 소원이 뭐 였는데? ”

 

“ 축구 잘 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

 

“ 넌 지금도 축구 잘 하잖아 ”

 

대답 대신 입만 삐죽 내밀고 옆으로 폴짝 뛰어 가는 민재입니다.

 

“ 자기가 생각한 만큼은 잘 하지 않나 봐~ ”

 

“ 이야~ 그래도 소원이 이뤄진 사람이 더 많으니까 다음에는 더 큰 소원 써서 더 높은 산에다 묻자. 어느 산이 좋을까? ”

 

“ 구름 산이 더 높아요. ”

 

“ 아냐~ 도덕 산이 더 높아! ”

 

그러자 갑자기 정호가 불쑥 튀어 나오며 한 마디 던집니다.

정호의 한 마디에 모든 아이들과 선생님은 고개를 끄떡입니다.

 

“ 구름 산은 220미터고 도덕 산은 240미터야~ 그러니까 도덕 산이 더 높아! ”

 

→ 선생님 기억이 신통찮아서 정호가 정확히 몇 미터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충 위와 같이 말했던 것 같습니다.

 

“ 좋아~ 그럼 다음에는 도덕 산에 묻자. 이번에는 물 안 들어가게 잘 묻어야지? ”

 

아이들과 함께 산을 내려옵니다.

내려오는 중에 뱃속이 출출한 것이

갑자기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이 먹고 싶어집니다.

 

“ 우리 내려가서 야구 시합할까? 배드민턴 야구 시합! 굉장히 빠른 공도 있는데... ”

 

호주머니에서 털이 죄 빠진 셔틀콕 하나를 꺼냅니다.

 

“ 맞아! 저 공 진짜 빨라! 아까 배드민턴 쳐 봤어! ”

 

“ 이기는 팀 호빵 사 줄게! ”

 

“ 정말이요? ”

 

“ 그럼! ”

 

하지만 시큰둥한 녀석도 있습니다.

 

“ 나... 야구 못 하는데... ”

 

“ 괜찮아! 선생님이 알려줄게. ”

 

팀을 나눕니다.

역시나 곧잘 하는 녀석들은 끼리끼리 편을 먹습니다.

하지만 팀을 다시 나누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드민턴 야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양 팀에 한 명씩 나눕니다.

선생님들은 투수를 합니다.

털이 다 빠진 셔틀콕을 무지개 모양으로 던져주면

타자는 배드민턴 라켓으로 쳐 냅니다.

1루, 2루, 3루, 홈 베이스도 있습니다.

단 하나 없는 것은 포수입니다.

두 팀 모두 공격, 수비를 한 번씩 하고나니

두 팀의 실력차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셔틀콕을 쳐 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날아오는 셔틀콕을 받고 못 받고 차이는 무척 큽니다.

덩달아 야구 룰을 모르는 녀석도 있어

셔틀콕을 치고 나서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도 보입니다.

저울마냥 점수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0: 1까지 됩니다.

하지만 점수와는 상관없이

지고 있는 팀도 재미는 10점만큼 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야구가 끝났습니다.

이긴 팀 아이들이 호빵을 사 달라합니다.

 

“ 호빵은 오늘 사 주는 것이 아니라 화요일 수업할 때 선생님이 가지고 갈게. ”

 

“ 정말이죠? ”

 

“ 그럼~ 정말이고말고. 그리고 진 팀도 호빵을 먹을 수 있게 준비할게. ”

 

이때부터입니다.

이긴 팀 아이들이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 진 애들은 왜 줘요. 우리만 줘야줘. ”

 

“ 진 아이들도 주자. 너희들은 이겨서 먹는 것이고 진 아이들은 선생님이 그냥 주는거야. ”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

 

“ 함께 먹으면 더 좋잖아. ”

 

“ 안 돼요. 선생님이 이긴 팀만 사 준다고 했잖아요. ”

 

“ 선생님이 이긴 팀 사준다고 했지. 진 팀은 안 사준다고 안 했는데? ”

 

“ 거짓말하지 마요. 이긴 팀만 사 준다고 했잖아요. ”

 

“ 아니야. 정말이야. 이긴 팀 사준다고 했지. 이긴 팀만 사준다고는 안 했어. ”

 

점점 불만이 거세지는 아이들이 다른 제안을 해 옵니다.

 

“ 그럼, 우리는 열 개 주고 진 애들은 하나 씩만 주세요. ”

 

“ 꼭 그렇게 차이가 나야만 되겠어? ”

 

“ 네! 그래야 되요. ”

 

“ 그럼 선생님이 호빵을 하나만 가지고 올 테니 이긴 팀끼리 하나 가지고 나눠 먹는 건 어때? 진 팀은 주지 않고. ”

 

“ 좋아요. 그렇게 해요. ”

 

“ 다 같이 나눠 먹으면 한 명이 하나씩 먹을 수 있는데 그렇게는 싫어? ”

 

“ 네. 싫어요. ”

 

“ 너희들이 적게 먹더라도 진 팀 아이들이 먹는 것은 싫다는 거지? ”

 

“ 네! ”

 

할 말이 없습니다.

 

“ 너희들은 이겼잖아. 이긴 사람들이 진 사람들에게 그 정도는 베풀어도 되지 않아? ”

 

“ 안 돼요! ”

 

“ 너희들은 너희들이 이길 걸 알고 있었지? ”

 

“ 이길 걸 어떻게 알아요! ”

 

“ 너희 팀에는 야구를 잘 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진 팀 아이들은 봐봐. 야구를 잘 하기는 커녕 야구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잖아. 야구 규칙도 모르는 아이들도 있고. ”

 

“ 그래도 이겼으니까 이긴 팀만 사 줘야 줘. ”

 

“ 한 명씩 물어보자. 네 생각은 어때? 너도 이긴 팀만 먹어야 된다고 생각해? ”

 

“ 모르겠어요. ”

 

“ 저도 모르겠어요. ”

 

“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

 

선생님이 계속 다른 제안을 하면서

진 팀 친구들에게도 호빵을 주려고 하자

이긴 팀 아이들 중에서 슬슬 눈치를 보던 녀석 몇은

자신의 생각을 묻는 선생님에 말에

슬그머니 꼬리를 빼기 시작합니다.

 

“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선생님이 화요일에 호빵을 가져 올 테니까 어떻게 먹을지 그때 다시 결정하도록 하자. 오늘은






반대하는 친구도 있고 찬성하는 친구도 있으니까. ”

 

끝까지 고집을 부르던 녀석들은

입이 한 뼘이나 나와서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집으로 가버립니다.

선생님이 사거리 차도까지 함께 걸으며 묻습니다.

 

“ 다시 생각해 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함께 먹으면 안 돼? ”

 

“ 싫어요! ”

 

녀석도 고집이고 선생님도 고집입니다.

 

“ 그래. 알았어. 그럼 화요일에 다시 얘기해 보자. 잘 가~ ”

 

여전히 인사 없이 돌아서는 녀석.

 

녀석들 말이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이긴 팀에게 호빵을 사 주기로 했으면 이긴 팀에게만 사 줘야지요.

하지만 선생님 생각에는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호주머니 털어 산 호빵이

왠지 반쪽만큼만 따뜻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에게 바람이 있다면

운동을 잘 하는 녀석들이

운동을 잘 못해 운동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녀석들에게

운동을 통한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인데,

이것을 기대하기에는

아직은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은 것 같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땅이 꽁꽁 얼어붙어

삽질을 해도 깡깡 쇳소리만 나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철망산보다 더 높은 도덕 산에 올라

다시 한 번 타임캡슐을 묻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선생님의 소원도 하나 적어 넣어두고 싶습니다.

으르렁 서로 싸우며 다툴 때는 다툴지언정

이 녀석들이 서로를 아끼고 돕는 좋은 친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간절한 소원쪽지도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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