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몸이었을 때 두팔과 두다리로 내려다 본 곳은 아마도 커다란 빵 공장이었던것 같습니다.
작은 기억이 있습니다.
채 떠지지도 않는 눈을 떠가며 아버지 어깨에 실려 밤기운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가로수 나무 아래에서 동생들과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일곱살난 아이였습니다. 두 눈에 무서운 불길이 치솟는 것이 아마도 집에 불이 났던 모양입니다.
작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무서운 음성이 들립니다.
아무말도 못하고 아무말도 못하는 동생들과 함께 그렇게 오랫동안 기차를 타 보기는 처음입니다. 아침 햇님이 미국햇님인 것처럼 생각하게 한 높다란 빌딩과, 머리 꼭대기에서도 한참이나 높이 있는 다리를 본 것은 국민학교 4학년 어느 여름날 아침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금껏 가슴을 짓누른 서울.. 그곳은 바로 서울이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하늘에 있는 다리를 지나 한참이나 갔습니다. 낯선 곳 낯선 집 낯선 사람앞에서 어머니, 아버지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어머니, 아버지였습니다. 가슴이 바닥까지 쓸리우도록 눈물을 쏟아내시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서울 하늘아래에서의 시작입니다.
작은 다락방이 생각납니다.
무서운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중학생입니다. 사나운 짐승의 싸움소리인지 죽어가는 고양이의 마지막 울부짖음인지 귀가 찢어지도록 아픈 고통의 소리가 들립니다. 너무도 무서워 작은 창 작은 눈으로 들여다 보기까지 수십번 무서움을 참습니다. 어떠한 짐승도 고양이도 아닌 아버지의 피흘리는 모습이 있고 칼을 든 낯선 남자의 음성이 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빚을 많이 져서 서울로 야반도주를 한 것이며, 친척 할아버지댁 단칸방에 몰래 몰래 숨어 살다가 빚쟁이들에게 덜미를 붙잡힌 것이었습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매서운 문소리에 문을 열고 있는 것은 18살 고등학생입니다. 경찰입니다. 아버지를 찾고 아버지가 함께 갑니다. 그로부터 아버지는 집에 오시지 않습니다. 열리지 않던 현관문을 들어선 사람은 아버지가 아닌 막내 고모부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 친지의 결혼부주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주공장의 소주를 몇상자나 훔친 죄를 지었습니다.
작은 다락방이 생각납니다.
콧물로 눈물로 얼룩지어지던 편지가 생각납니다. 경찰서장에게 재판관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이 쓰는 선처의 편지였습니다. 편지덕인지 막내 고모부덕인지 아버지는 한달이 채 못 되어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 오셨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전봇대 밑에서 길위에서 그렇게 밤을 지새우셔야만 하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직업을 구하지 못하셔서 밤새 고물을 줏어다 팔고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머리에 띠를 두른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하늘을 향해 삶의 원망을 쏟아내던 차없는 차도에서 엉클어진 머리에 리어커를 동여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영등포 사거리에서 전경들이 뿌려대는 물대포를 맞으며 그렇게 만난것이 대학교 2학년 때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목숨과도 같은 포장마차를 지키기 위해서 쇠사슬로 목을 묶고 시위에 참가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자그마한 꼬마들을 가르치는 지금은 유치원 선생님입니다.
지난 9월 어머니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평생 짐스러워 하시던 빚을 생각만이라도 잊지 못하시고 매일 저녁 빚걱정에 못난 자식 가슴에 못을 박으시더니, 매일 저녁 추운 포장마차 작은 온돌위에서 허리 한 번 추수리지 못하시고 웅크리고 밤을 지새우시더니, 아픈 배를 움켜쥐고 돈이 없어 돈이 웬수라 말하시며 그렇게 병을 키우시더니, 못내 참지 못하시고 서울 하늘 아래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그렇게 쓰러지셨습니다. 그렇게 나선 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선 길이 다시는 되돌아서지 못할 길이 되었습니다.
위암이었습니다. 위암말기였습니다. 세달을 채 넘기시지 못하시고 늦은 구월의 이른 새벽에 채 감기지 않는 눈을 감으시고 그렇게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평생 지신 빚덩이를 목숨값으로 짊어 지시고 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지고 가신 업보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쫓아다니던 빚은 아직도 그 모양새를 가지고 그렇게 서울하늘아래에서 무섭게 내려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께서는 병원비가 없어 병원비 걱정으로 암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3개월을 그렇게 그렇게 계속 참아 오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경기도의 작은 집에 아버지, 동생들하고 그렇게 오손도손 살아갑니다.
나중에.. 나중에.. 때 늦게 나중에.. 그렇게 알기전에 이제는 이미 보란듯이 알고 있으며, 넓은 하늘아래 보란듯이 떳떳하게 살아 갑니다. 작은 가슴 큰 멍울, 얼룩 덜룩 얼룩진 선생님이지만 작은 아이들 가슴에 밝은 웃음 건네주는 희망이 선생님으로 살아 갑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목숨값은 이제 빚이 아니라 잘난 아들입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빚은 잘난 아들에게 희망을 준 빚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그 빚이
희망에 찬 빛이 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