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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의 일기(녹음본)

비 이야기

 

 

늦잠을 잤습니다.

따뜻한 봄소식에 용기를 얻어 기름값 걱정에 회관 보일러를 껐더니..

못내 아쉬워 가지 못하던 겨울님과 밤새 한바탕 사투를 벌렸죠..

! ! 두드리는 문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며 그렇게 시작된 아침입니다..

 

늦잠을 잔 유치원선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언덕배기 진달래가 깨끗하게 단장한 얼굴로 바람님을 벗삼아 그네줄을 타고 있었습니다.

밤새 소리없이 비님이 찾아 왔습니다.

길게 드리운 물줄기로 아무리 쏟아내도 흙밭을 쓸어내기 힘들더니

밤새 곱게 내린 비님의 손길에 현관이 하얗게 새단장을 한 아침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습니다.

늦잠을 잔 턱에 세수하고 면도할 시간도 없이 아이들이 먹을 쌀을 씻고 물을 기르고

현관에서 복도까지 커다란 대걸레를 타고 스케이트를 탔습니다.

 

무릎까지 걷어부친 바지가락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아이들은 노랑,빨강 강아지 우산을 쓰고 재잘재잘 현관문에 들어섭니다.

 

'안녕, 달봉아!'

 

여섯살 녀석의 심술궂은 인사에 다섯살 막내녀석들이 너도 나도 할것없이 따라 욉니다.

'안넝.. 달뽕아!'

 

발음도 시원찮은 꼬멩이들을 허리굽혀 반기며, 아침전쟁은 그렇게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비님은 요상합니다..

색깔도 내음도 별반 다를것 없이 언제나 그렇게 그런모양 그런 모습으로 비님은 변한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님을 바라보는 저의 마음은 언제나 요상합니다.

빗물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눈물과 함께 진한 짠맛을 안기우던 그때의 그 비님과,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의 어깨에서 물씬 풍겨오던 물내음에 키스하던 그때의 그 비님과,

아이들의 강아지 우산에 맞아 똑 부러져 버리는 그때의 그 비님은 제 마음에선 분명 다릅니다.

 

보이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나 다른 까닭일까요?

잘못없는 비님에게 언제나 덮어 씌우기만 하는

친구의 잘못만을 이야기하는 아이들 세상의 꼬멩이 아이들처럼 비겁한 사람들 때문일까요?

 

별반 다를것 없는 그 모양, 그모습의 비님이지만 숱한 이름을 선물받으며, 그렇게 그렇게 소리없이 찾아드는 비님입니다.

 

이제는 이름붙이기두 미안합니다.

이제는 원망하기두 미안합니다.

그냥.. 이렇게..

늦잠을 잔 오늘 아침처럼...

소리없이 찾아드는 비님을 바라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