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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봉샘의 성장통

인 연


1.

오늘은 태권도 마지막 띠 따는 날이었습니다.

매일같이 반팔옷에 반바지에

손 때, 흙 때, 놀이 때 잔뜩 묻은 띠를 메고 오던 녀석들이

오늘은 하얀 태권도복을 입고 버스에서 내립니다.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때를 지우기 위해

팔팔 끓는 물에 삶아 빤 태권도복이

쭈글쭈글 할머니 얼굴로 나타납니다.

"선생님! 태권도 띠 따는 날, 몇 밤 남았어요?"

"오늘이다. 이녀석아!"

"히히..."

"선생님! 태권도 띠 따는 날, 몇 밤 남았어요?"

"오늘이래두 이녀석아!"

"히히..."

물어도 물어도 자꾸만 묻고 싶어 지나 봅니다.

들어도 들어도 자꾸만 듣고 싶어 지나 봅니다.

선생님 마음에 손바닥만한 아쉬움이 생기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연신 태권도 띠를 매만집니다.

오후에는 아이들과 몸 터를 청소합니다.

커다란 공기매트를 영차 끌고서 작은 몸 터로 옮깁니다.

엄마, 아빠 앉을 의자도 놓고

아이들 앉을 마루도 닦습니다.

구석 구석 쌓인 먼지를 쓸며

구석 구석 담아 두었던 기억들을 꺼냅니다.

"태권도 하기 싫어요!'

"왜?"

"피곤해요"

"피곤해?"

"네!"

"피곤한게 뭔데?"

"다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코도 아프고 다 아픈거요"

"다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코도 아프고 다 아파?"

"네!"

"마음도?"

"........."

"마음은 안 아파?"

"마음은 안 아파요"

"그럼, 앉아서 볼 수는 있겠네. 친구들이 선생님이 재미있는 태권도 하는 모습을..."

피곤하다고 하는 녀석들이 많은 날이면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면서

있지도 않은 태권도사 이야기를 해 줍니다.

팔도 다리도 눈도 코도 모두 아픈 녀석들이

귀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지

앉아서도 웃고 누워서도 웃고 엎드려서도 웃습니다.

"화장실 갔다 와라"

우루루 달려가는 태권도복들을 바라봅니다.

한 뼘씩이나 더 큰 태권도복을 입고서

팔도 접고 다리도 접고

접어 올린 만큼 클 것이라고

접어 올린 만큼 태권도를 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만큼 크기 전에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은 기분도 제일 좋고 기합 소리도 제일 크고

그래서 태권도도 제일 잘 하게 되는 날이야.

잘 하고 싶은 마음보다 더 잘 하게 되는 날이야.

왜냐하면 오늘은 너희들이 기다리던 띠 따는 날이거든.

오늘! 멋지게 할 수 있지?"

"네!"

"엄마, 아빠 가슴이 천정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도록 멋지게 할 수 있지?"

"네!"

힘찬 대답 소리에 선생님 마음이 넘어졌다 일어섭니다.

엄마, 아빠가 오셨습니다.

손에 손에 카메라를 들고서.

작은 아이들 큰 모습을

가장 행복한 오늘 하루를 잊지 않기 위해.

순서지를 나누어 줍니다.

송판 한 장씩을 나누어 줍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띠를 나누어 줍니다.

순서지를 읽은 엄마들이 조심스레 묻습니다.

"선생님! 이제 태권도 안 하는거에요?"

"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많이 아쉽네요"

"예...저도 그래요"

띠 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 오늘은 우리 아이들이 띠를 따는 날입니다.

오늘은 이 아이들에게 그 어떤 날보다 소중한 날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띠 따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님들께서 들어 오실 때 아이들 표정을 보셨나요?

엄마를 본 녀석들은 다른 녀석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녀석들이 어떻게 할지 선생님인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 녀석들이 아무리 잘 해도 여섯 살, 일곱 살입니다.

이 녀석들이 아무리 못 해도 여섯 살, 일곱 살입니다.

우리 아이만 들여다 보시면 우리 아이도 엄마만 바라봅니다.

우리 아이 곁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봐 주세요.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엄마 곁에 있는 다른 엄마들도 보면서

지금껏 땀 흘린 것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도록...

시작하겠습니다. "

아이들이 무릎을 두드립니다.

일어 설 준비를 합니다.

"태권도...일어...섯!"

"태- 권!"

의자가 들썩입니다.

마음이 술렁입니다.

아이들의 힘찬 모습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에 대한 기쁨이

비좁은 몸 터를 지나 지붕 위 하늘까지 닿습니다.

움직임 하나 하나

눈동자 하나 하나

그 작은 모습들 속에서

그 당찬 모습들 속에서

선생님은 말없이 웃고만 있습니다.

송판 격파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틀 전 연습이 떠 오릅니다.

'이 나무를 내가 부술 수 있을까?'

'얍!' 소리와 함께 내려 친 손날이

송판에 살짝 닿았다 떨어집니다.

"나무가 간지럽다고 하겠다. 이녀석아!"

"얍! 얍! 얍! 아- 손 아프다!"

"나무가 부숴지면 손이 안 아파. 그런데 나무가 부숴지지 않으면 손이 아파.

선생님이 나무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놓았으니까 걱정말고 쳐 봐. 힘껏!

그럼, 네가 약하게 치더라도 나무가 스르르 부숴질꺼야."

"얍! 어? 정말이네?"

"태- 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줄 지어 앉은 아이들과

줄 지어 누워있는 나무들과

줄 지어 바라보는 눈 들이 있는 가운데

침이 꼴깍!

격파가 시작됩니다.

"얍! "

"얍!"

넓은 바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듯

너울 너울 시원한 바람 산 타고 넘어오듯

나무들이 부숴집니다.

기합소리 터져납니다.

박수소리가 그칠 줄 모릅니다.

"이-야~"

선생님도 놀랍니다.

연습할 때는 그렇게도 더디기만 하더니만

오늘은 파도치듯 넘어갑니다.

물결치듯 힘찹니다.

"아이들이 정말 잘하네요"

"어머님들도 잘 하셔야지요"

엄마들의 격파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헤헤 히히 웃습니다.

"우리 엄마가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꺼야. 우리 엄마니까..."

"얍!"

"얍!"

송판들이 깨어집니다.

지나간 시간들이 순간 순간 터져납니다.

"자! 이제 띠 격파시간입니다.

먼저 나누어 드린 띠가 들어있는 포장지를 잘 들고 나 오세요.

양 손으로 꽉 잡고 아이들이 힘차게 내려치도록 해 주세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띠가 폴짝 뛰어 나오도록!"

"띠 격파 준비!"

"얍!"

"띠 격파 시- 작!"

"얍!"

"우~ 와!"

아이들이 함성을 지릅니다.

좋아서 폴짝폴짝 뜁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로운 띠를 받았습니다.

엄마들도 즐겁고

아이들도 즐겁고

바라보는 선생님도 즐겁습니다.

마지막 태권무를 합니다.

작은 숨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고

작은 동작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여

띠 따는 오늘 행복한 하루를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입니다."

"선생님! 수고 하셨어요"

"선생님! 너무 아쉬워요"

"선생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고개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행복으로 기억합니다.

오늘은 아이들이 띠를 따는 날이었습니다.

2.

내 나이 여섯 살

어머니 손을 잡고 처음 들어선 곳이

동네 태권도장이었습니다.

삐거덕 거리는 마룻바닥

하얀 태권도복을 입은 태권도 사범님의 얼굴에

누런 이가 반짝입니다.

웃어도 무서운 얼굴입니다.

"처음 온 녀석이군. 어디 노래 한 번 해 봐라"

"엄마! 태권도 무서워!"

태권도와의 첫 인연은 참으로 시시하게 끝납니다.

서울로 이사를 갑니다.

집도 없이 이삿 짐도 없이

몸만 가는 이사입니다.

학교에 가려해도 가방이 없습니다. 책이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얼굴에서

무서운 사범님의 얼굴을 봅니다.

태권도를 배웁니다.

하얀 도복이 마음까지 하얗게 칠해줍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말은

목이 터져라 질러대는 기합이 됩니다.

고개숙인 아버지 떨리는 손가락 사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담배연기 때문에

눈이 메워 그렇게 울기만 했던 그때부터.

돈이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사람이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태권도는 내게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슬프면 슬플수록 태권도는 내게 웃음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가 없어도

아무것도 없이 가장이 되었어도

내게는 태권도가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군인이 되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든

언제나 내 곁에는 든든한 태권도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태권도를 처음 만난 그 때의 나처럼

키도 작고 몸도 작고 얼굴도 작고 손도 작은 아이들.

"선생님! 태권도 할 줄 알죠? 태권도 가르쳐 보실래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태권도.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태권도와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할께요. 하고 싶어요!"

내가 처음 태권도를 만났듯

태권도를 처음 만난 아이들과 함께 한지 어느덧 8년!

오늘은 태권도 마지막 띠 따는 날이었습니다.

손바닥만한 하얀 도복을 입고

엄지만 퐁당 빠진 아기 주먹을 쥐고서

작은 키에 작은 입에 쩌렁쩌렁 울려대는 기합소리를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날입니다.

재미없을까 힘들까 걱정에 걱정

엉덩이 씰룩씰룩 주먹지르는 태권무도 만들고

옛날 옛날 태권도사 이야기도 만들고

유치원 선생님 달봉이 선생님

태권도 선생님 이름마져 좋아서

힘들어도 붙잡고 좋아서도 붙잡던 태권도입니다.

만들 줄만 알았지 놓을 줄 모르는 선생님.

이제는 놓아야 합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목수처럼 마술사처럼

뚝딱해서 만들고 뚝딱하며 행복했었는데

이제는 놓아야 합니다.

더 행복한 일을 위해서

더 행복한 나를 위해서.

세 밤, 두 밤, 한 밤!

태권도 하는 날만 꼽아대는

그 작은 눈망울에 못 이겨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런 한 번이 8년이 되었습니다.

아쉬워하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아쉬워하는 내가 보입니다.

태권도는 더 이상 하지 못하더라도

선생님 곁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태권도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인연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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