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습니다.
높다란 천정
넓은 창
집이 아닙니다.
1학기 마지막 축구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의 아버지들과 다리가 휘청거리도록 축구를 하고
터벅터벅 걸어 온 사무실
세수하고 발 닦고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인것이 벌써 11시가 되었습니다.
부시시한 머리로 거울 앞에 섭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 참으로 편안합니다.
거울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납니다.
옥길동 회관에서 살던 생각이 납니다.
넓다란 벽에 붙은 하얀 칠판을 봅니다.
빽빽히 들어선 행사며 일정들이 파리떼처럼 앉아 있습니다.
그 중에 큼지막하게 써진 빨간 글씨 하나
제헌절!
'오늘이 제헌절이구나!'
아침 11시부터 시작된 학부모 상담
축구 시간을 생각하여 1시간 여유를 두었지만
시간에 맞춰 진행하는 상담이 아니라
축구 시간이 다 되어서야 상담을 마쳤습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퇴근 하는 아버지들
하숙집을 드나들듯
잠시 눈만 붙이고 출근하는 아버지들에게
모진 선생님은 아빠라는 이름을 다시 세겨 줍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삶은 더욱 행복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상대로 아버지들에게 숙제를 던져줍니다.
혹 하나 더 다는 일이 아니라
짐 하나 더는 일이라고...
허겁지겁 달려간 운동장에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내린 비로
오지 않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촉촉한 땅과 덥지않은 느낌이
축구하기에는 좋은 날씨입니다.
덥지말라 하늘에선 간간히 비를 뿌려주고
군데군데 패인 곳 작은 웅덩이들이
풍덩풍덩 신바람을 더합니다.
1학기 마지막 수업이라
어머님들께서 쫑파티를 하신답니다.
작년 한해동안 선생님에게 행복을 주었던 일곱 살 녀석들.
졸업하면 보기힘든 녀석들을 붙잡아 만든 축구단입니다.
김밥이며 수박이며
운동장에 차려진 소박한 잔치는
오늘을 준비한 어머님들의 정성만큼 풍성합니다.
선생님에게는 가족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가족입니다.
불어나는 가족만큼 행복한 시간도 많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가족들과 함께 뜀박질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밥도 같이 먹었습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홀로 앉은 사무실이 정겨운 이유입니다.
방학입니다.
풀씨학교도 방학이고
축구단도 방학이고
선생님도 방학입니다.
8년만에 긴 휴가를 떠납니다.
휴가 때면 항상 동물들 걱정에
휴가를 가지 못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하루라도 집을 비울라치면
눈을 감아버리던 토끼가 생각납니다.
날개를 움직이지 않던 새가 생각납니다.
이제는 동물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마음 편히 휴가를 떠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또 다른 가족이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기다리는 집으로 말입니다.
집 많고 가족 많은 선생님은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들고 집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