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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봉샘의 성장통

아버지의 여자 친구


아버지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아버지 스스로는 친구가 아니라

필요해서 이용해 먹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들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여자 친구는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목소리 큰 할머니이고

내 집 네 집 가리지 않고 드나드는 팔방미인(八方美人)입니다.

아침이면 이쪽 골목 끝에서 저쪽 골목 끝까지

내 집 마당 쓸 듯 청소를 하시고

이 집 저 집 쓰레기를 한데 모아 동네를 윤기 나게 하는 분입니다.

앞이 막힌 파란 색 고무 슬리퍼를 신고

슬리퍼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리 짧은 짙은 색 '몸 빼 바지'를 입고

한 쪽 팔을 기억 자로 접어 뒤뚱뒤뚱 걷는 할머니.

한 눈에 봐도 몸이 불편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성한 사람보다 더 부지런하시고

더 열심히 하십니다.

자세한 연세는 모르지만

아버지 말씀으로는 아버지보다는 많이 어리다고 합니다.

입도 불편하여 말소리도 분명치 않지만

동네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것만은 사실입니다.

참으로 거침이 없는 할머니이십니다.

아버지와는 어떻게 친하게 되었지만 여쭤 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 돕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와는

첫 눈에 서로 알아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아들 없을 때 함께 텔레비전도 보시고

종이상자며 폐품이며 같이 모아 손수레에 싣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며

손이 잘 맞는 친구이신 게 분명합니다.

어머니 살아 생전에

어머니와는 한 번도 저리 가까이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 할머니와는 매일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줄곧 헛기침을 하시며

'내 이용해 먹을 대가 있어 이용하는 것' 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소리를 듣는 아들은 웃기만 합니다.

그래~ 이용해 먹는 사람이,

지하철을 한 번도 타 보지 못했다 하여

남들 눈 의식하지 않고 지하철 여행을 함께 하고

영화 구경 못했다 하여 노인 두 분 이서만 영화 보러 가시고

점심때면 꼬박 꼬박

손수 국수를 삶아 점심을 챙겨 주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 청계천 물 길이 처음 열리는 날에도

자식들이 아버지 생각하여 마련한 자리에

버젓이 할머니 이끌고 나타나신 모양을 보면

절대로 그냥 이용해 먹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할머니께 다른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큰아들 눈에는

외로운 아버지와 늘 함께 해 주시는 할머니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몇 년째 해 오던 공사판 일을 접으시고

몇 달을 일없이 쉬실 때

외로워 못 살겠다던 아버지를 볼 때는 참으로 가슴 아팠습니다.

아버지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하며 나누는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내 어찌 이리 아버지 닮은 구석이 많은지...

일이 빨리 끝나 집에 일찍 온 날에는

현관에 여지없이 파란 색 슬리퍼가 보입니다.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시는 모양을 본 적도 있고

방을 닦거나 심지어 빨래를 널기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빨래까지 맡기시다니

하시는 분이나 맡기시는 분이나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시는 모습을 보면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은 아닌데...

그냥 뚫어져라 화면만 각자 바라보시지만

간간이 웃음소리가 함께 나는 것을 보면

재미가 있긴 있으신 모양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께서

항상 열어 놓던 방문을 닫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방해가 될까봐

아들도 나름대로 방문을 닫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방문을 닫고 있으면 불편하긴 합니다.

몸 뚱아리 하나 겨우 눕힐 수 있는 좁쌀 만한 방이라

문을 닫고 있으면 답답하기 이를 때 없지만

서로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언제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몸이 불덩이처럼 팔팔 끓어 일찍 퇴근한 날

여지없이 계시는 할머니를 뵙고

고개만 꾸뻑 숙여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자기를 보고 불편해 하는 것 같아

이제는 집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삐쳐서 가셨다는 아버지 말씀을 듣고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아이 같다 하더니

할머니가 꼭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삐치기도 아이들만큼 잘 삐치시고

삐쳤다가도 금방 풀어지시는 모양이 그렇습니다.

두 분 이서

서로 말벗하시며

언제까지나 그렇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들 몫을 덜어주시는 우리 동네 큰 목소리 할머니

아버지의 여자 친구 할머니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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