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놀이를 말하다!
- 첫 번째 이야기 -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발적으로 하는 놀이를 자유 놀이라고 합니다. 물론 즐거움을 얻기 위해 논다고 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노는 것과 놀이는 조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같은 의미로 생각해도 무관합니다.) 아이들은 노는 것 자체가 그냥 편하고 좋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었을 때 만족을 얻습니다. 이러한 만족감은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만족할 만큼 충분히 놀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아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충분히 놀도록 내버려두는 부모나 선생님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풀씨 학교에는 자유 놀이 시간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 놀이 시간은 그 어느 시간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이지 못한 어린이들은 놀이를 할 줄 모릅니다. 수동적일 수 없는 놀이마저 누군가가 놀아줘야 합니다. 장난감이 놀아주고 부모가 놀아주고 선생님이 놀아줘야 합니다. 이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어린이들은 평생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영어를 잘 하고 피아노를 잘 치고 그림을 잘 그리고 운동을 잘 하는 것은 단순히 기술을 잘 익힌 것입니다. 영어가 피아노가 그림이 운동이 나 대신 살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수단을 배우기 위해 자발성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입니다.
삶은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산다는 것처럼 놀이에 잘 어울리는 말도 없을뿐더러 아이들에게 노는 것만큼 가장 잘 어울리는 옷도 없습니다.
아이들을 마음껏 놀 게 해 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스스로' 와 '충분히'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자유놀이는 마음대로 노는 놀이입니다.
정해진 규칙이나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아이들만큼 형태도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노는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규칙과 방법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규칙이며 방법입니다. 물론 어른들이 보기에 잘못된 규칙과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쓸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 부모인 우리와 교사인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은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가는 배움의 과정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시행착오는 깨달음을 얻기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어린이, 실수하지 않는 어린이를 상상해 보세요.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잘 하는 아이처럼 보이지만 그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생길 잘못이나 실수를 늘 염려하며 살 지도 모릅니다. 또한 실수를 통해 얻게 되는 자기 노력의 과정과 그것을 극복하였을 때 얻게 되는 희열을 평생 모르고 살지도 모릅니다.
현명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비교한 우스개가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결코 빠지지 않을 함정에 빠져 재치 있게 빠져 나오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 생각합시다.
"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내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되었으면 하나요?
해답은 자유 놀이 속에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자유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풀씨를 살짝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자유 놀이를 말하다!
- 두 번째 이야기 -
점심시간 각자 반에서 밥을 먹은 후 자유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둘러봅니다. 사무실에서 나가자마자 복도에 앉아 딱지를 접고 있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담임선생님에게 이면지를 달라고 해서 딱지를 접고 있는 중입니다. 딱지를 다 접은 다음에는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합니다. 딱지치기를 해서 딱지를 잃은 아이들은 또 종이를 찾으러 갑니다. 만약 이면지가 없다면 밖에 나가서라도 쓸 만한 종이를 찾아서 옵니다. 딱지를 딴 아이는 친구들이 딱지를 만들어 올 때까지 가지고 있는 딱지를 가지고 혼자서 딱지치기를 하며 놀고 있습니다.
나리꽃 반을 살짝 들여다보니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역시 이면지에 나름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무척 재미있는 모양입니다. 서로 깔깔 웃기도 하고 귓속말을 하기도 합니다. 별꽃 반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바깥놀이를 나갔나 봅니다. 다섯 살 반도 아무도 없습니다.
일곱 살 질경이 반에 갑니다. 혼자서 블록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며 열심히 비행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남자 아이들 몇은 책상에 걸터앉아 말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놀이를 하다말고 놀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조정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몸 터 안에는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아이들이 어우러져 여러 가지 놀이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스펀지 뜀틀을 길게 깔아 침대를 만들고 엄마, 아빠 놀이를 하는 일곱 살 아이들도 있고 철봉과 뜀틀을 연결하여 무엇인지 모를 건축물(?)을 만든 여섯 살 아이들도 있습니다.
베란다를 통해 밖을 내다보니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많은 아이들이 보입니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아이들이 군데군데 모여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무슨 놀이를 하냐고 물으니 한 녀석이 냉큼 " 아무 놀이해요! " 하고 대답합니다. 순간 녀석의 대답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놉니다.
그것이 무슨 놀이든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이 마음이 가는대로 노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만의 모습도 아니고 점심시간 이후만의 모습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놀 시간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이렇게 하고 싶은 대로 놉니다. 풀씨 학교 안에서는 크게 위험하지 않은 이상 아이들의 놀이를 제약하지 않습니다. 무슨 놀이를 하든 누구랑 놀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제약이 없는 놀이가 바로 자유놀이입니다.
그런데, 자유 놀이가 모든 아이들에게 다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혼자서는 놀지 못하고 함께 놀아도 편하지 않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놀이와 친구관계 속에서 자기 역할이나 위치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놀다가도 친구와 다투기도 하고 다툰 친구와는 다신 안 놀 것처럼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또 좋아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몇 날 몇 칠 그리고 몇 달 동안 계속 됩니다. 친구관계가 돈독해지기도 하고 새로운 친구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놀이의 패턴이 만들어집니다.
아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결코 선생님이나 어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풀씨 학교 자유놀이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자유놀이는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면서도 서로 다른 아이들의 모습처럼 서로 다른 각각의 형태를 가집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나름의 질서와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질은 구성원이 달라지거나 바뀔 때마다 항상 변화합니다. 또한 그것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는 놀이를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선생님의 역할은 재판관도 감시자도 아닙니다. 아이들의 요청에 따라 또는 놀이의 흐름을 막지 않는 선에서 교사의 판단에 따라 개입이 아닌 참여로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스스로 선택하도록 합니다.
자유놀이는 자발성이라는 교육적 용어를 무색하게 하는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자기욕구의 실현과정입니다.
교육은 가르치려 들 때 어긋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