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누구였더라?
“ 창욱아~ 창욱아~!! "
아~ 아버지!
눈보다 몸이 먼저 일어납니다.
분명 아버지 목소리입니다.
“ 왜요! 무슨 일이에요! ”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시커먼 아버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라집니다.
“ 어서 나와봐라! 불났다! ”
불!!
허겁지겁 옷을 입습니다.
방문을 여니 부엌이 온통 발자국 투성 입니다.
화장실에서 물통 채 들고나서는 아버지.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현관문을 나서자 시뻘건 불길이 보입니다.
폐지에 불이 붙었습니다.
아버지 리어카에 실려있던.
찬장을 열고 냄비를 꺼내 들고 물을 담습니다.
들락날락 하시는 아버지 따라
물동이를 나릅니다.
‘ 그런데, 대체 불이 왜 난거지? ’
골목 길이 온통 연기 투성 입니다.
불길이 세차게 치 솟습니다.
춥지도 않은데 손이 바들바들 떨립니다.
“ 불이 왜 난 거에요! ”
“ 방금 까지도 멀쩡했는데 ”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지 못한 채
연신 물동이만 나릅니다.
치솟는 불 길 옆으로
옆 집 도시 가스 관이 즐비합니다.
리어카 앞에 주차되어 있는
시커먼 그랜저 자동차가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불붙은 물동이를 들고 집으로 달려가는 아버지가 보입니다.
“ 아버지! 물동이에 불붙었어요! ”
다른 물동이를 들고나서는 아버지 뒤로
불붙은 물동이가 화장실에 놓여 있습니다.
“ 아버지! 물동이에 불붙었다니까요! ”
화장실에서 타고 있는 물동이에 물을 끼얹습니다.
허둥대시는 아버지를 보며 침을 꼴깍 삼킵니다.
몸보다 마음이 앞서시는 아버지.
“ 아버지! 침착하세요! ”
어찌된 영문인지 물을 끼얹어도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 안되겠다. 더 큰 물동이를 찾아야겠다. ’
그런데, 참으로 희안한 풍경입니다.
세찬 불길이 치솟고
동네가 시끌벅적한데도
어느 누구도 내다보지 않습니다.
마치 텅 빈 동네처럼.
얼마나 지났을까...
불길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할 때
옆 집 젊은 사람 한 사람이 물동이를 들고나옵니다.
그런데, 이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물을 한 번 끼얹은 젊은 사람은
그 후로 다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잠시 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소방차가 온 것입니다.
다행히 누군가 불을 보고 신고를 한 모양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방대원이 불붙은 상황을 보더니
이내 달려가 호수를 들고 뛰어 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되어 숨을 돌리는데
아버지는 연신 뛰어 다니시며 성화이십니다.
“ 빨리 불 안 끄고 뭐해! ”
“ 소방차가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
아버지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셨던지
무엇이 그리 불안하신 지 가만히 계실 줄 모릅니다.
길바닥에 놓인 소방 호수를 봅니다.
그런데, 호수에게 물이 나오기까지는
그로부터 또 다시 10분이 넘는 시간이 걸립니다.
뭐가 이리 오래 걸리는지
도통 답답해서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바퀴가 터지고 검게 그을려진
리어카를 부리나케 끌고 가십니다.
스스로 내신 불이 아니더라도
동네 사람 시선이 걱정이 되신 모양입니다.
이렇듯 법석을 떨어도 내다보지 않는
동네 사람들이 말입니다.
불길이 사그라지면서
시커먼 연기만 잔뜩 토해냅니다.
그때, 골목 끄트머리에서 한 남자가 불쑥 튀어나옵니다.
“ 저 쪽에서 불 났다구요. 여기가 아니구요!! ”
동시에 두 군데에서 불이 난 것이었습니다.
불과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도
똑같은 불길이 치 솟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쪽에서 신고를 한 모양인데
다행히 소방차가 잘못 알고 이리 먼저 온 모양입니다.
어찌되었든 두 곳 모두 불을 끌 수 있었습니다.
“ 어떻게 된 거 에요? ”
그제야 숨을 돌리고 계신 아버지께 묻습니다.
“ 몰라~ 리어카 세워 놓고 담배 사러 간 사이에 불이 났다. ”
누군가 불을 낸 모양입니다.
두 번째 불이 난 곳이
여기서 한 달음이면 도착하는 골목이고 보면
같은 사람 소행으로 보입니다.
“ 아니~ 누가 이런 짓을 했데? ”
몇 몇 사람들이 골목 안에서 나옵니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 불이 났다고 신고한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시커먼 물과 함께 재로 변한 폐지들...
그 옆으로
안 그래도 시커먼 그랜저 자동차가
흉물스럽게 서 있습니다.
차에 불이 옮겨 붙지 않아 다행입니다.
저 멀리 소방관 둘이 옵니다.
화재 상황을 파악하러 오는 것입니다.
사진도 찍고 이것저것 묻기도 합니다.
한 명이 왔다 가면 또 한 명이 오고
소방관이 가고 나니 경찰관이 와서 또 묻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네 번이나 다른 사람에게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흉물스런 녀석들을 치웁니다.
경찰관 한 명이 경찰서에 가서 피해조서를 작성해야 한다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흠칫 놀라십니다.
“ 제가 갔다 올게요. 그냥 조서만 쓰고 오면 되요. 우리가 불을 낸 게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
경찰관이 그랜저 자동차 주인에게 전화를 겁니다.
알고 보니 바로 윗집 아저씨였습니다.
불이 날 때는 내다보지도 않더니
자동차에 이상이 생겼다 하니 옷을 입고 나오십니다.
경찰서에 앉아 진술을 합니다.
시계를 보니 새 벽 네 시가 넘었습니다.
이것저것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서
집으로 향합니다.
가로등이 환한 골목에
그림자 같은 쓰레기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쓰레기를 치웁니다.
불붙기 전에는 분명 쓰레기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정말 쓰레기가 된 종이들입니다.
집으로 들어가
발자국으로 어지럽혀진 부엌 바닥을 닦습니다.
시커먼 자국이 지워도 지워도 지워질 줄 모릅니다.
할머니께서 오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폐지를 주우시는 할머니.
잠결에 듣지 못했다고 연신 미안 해 하십니다.
제 손에서 걸레를 뺏어들고 방을 닦으십니다.
집을 청소하고 다시 밖으로 나섭니다.
아버지께서는 길가는 사람들이
행여 빙판에 넘어질까 연신 바닥을 닦고 계십니다.
뜨거운 물을 떠다 바닥에 붇습니다.
그새 얼어붙었던 물들이 녹아 내립니다.
“ 제가 닦을게요. ”
걸레로 길바닥을 닦습니다.
군 시절, 물 한 방울 없도록 바닥을 닦던 기억이 납니다.
“ 이제 됐어요. 그만 들어가요. 아버지. 추워요! ”
마지막으로 물 묻은 걸레를 비틀어 짜냅니다.
걸레에서는 김이 나는데
손은 깨질 듯이 시립니다.
검댕이 속을 달려온 것 마냥
아버지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행여 자동차에 옮겨 붙을까 무서워
리어카 손잡이를 잡았다가 손을 데인 곳을 보여 주십니다.
“ 왜 그러셨어요. 그냥 두셔도 되는데... ”
“ 그래도 자동차에 불이 붙으면 안 되잖아~ ”
“ 그건 그렇지만... ”
아버지 손을 보니 괜히 울화가 치밉니다.
“ 여기요~ 약 바르세요. ”
이부자리에 몸을 누입니다.
따뜻함이 느껴지니 찬 몸이 사르르 녹습니다.
창 밖으로 아침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설날입니다.
아버지 말씀에 저절로 난 불은 재수가 좋다 하는데
이것은 누가 일부러 불을 낸 것이니 해당사항이 없다나~
내일 아침
우리 동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겠지요.
밤 새 걸레로 박- 박- 닦았던 그 길 위로
또박또박 걸어다니겠지요.
오늘은
시작부터 우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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