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하지 않은 마음으로 고속버스에 오릅니다.
할아버지 산소 벌초를 위해 부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가방 속 약 봉지를 만지작거립니다.
아침 일찍 내과에 들러 받아 온 약입니다.
먹어도 신통치 않았던 약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점심을 거른 후라 출출한 느낌입니다.
그런데도 입 맛이 돌지 않습니다.
버스가 출발합니다.
추석이 코 앞이라 고속도로가 많이 막힐 것 같았는데
버스 전용차선이 있어서인지 순조롭게 달려갑니다.
한 낮의 하얀 구름이 어느새 검게 변했습니다.
졸음이 옵니다.
초저녁이라 잠을 청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잠 맛을 잃은지 오래된 듯 합니다.
' 어서 빨리 도착했으면... '
불안한 마음이 차창으로 그려집니다.
행여 버스 안에서 또 다시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창으로 비춰지는 얼굴을 봅니다.
낯선 느낌...
내가 아닌 내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집니다.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하얀 종이처럼
가슴이 졸아듭니다. 답답합니다.
또 다시 시작되는 알 수 없는 두려움, 공포...
노래를 부릅니다.
히죽 히죽 마른 웃음을 지어 봅니다.
공연히 헛기침을 하고 자리도 고쳐 앉습니다.
하지만 사라지기는 커녕 점점 커져만 가는 공포...
가슴이 타들어가는 느낌입니다.
허벅지를 꼬집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퍼렇게 멍이 들도록 꼬집어도
가슴 속 두려움은 사그러들 줄 모릅니다.
불안이 점점 커져갑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어떻게 될 것만 같습니다.
일어섰다 앉았다 일어섰다 앉았다
어수선한 모습에 옆 사람들이 힐끗 봅니다.
아..그런데...
다른 사람의 시선은 더이상 들어오지 않습니다.
" 잠시 후 휴게소에 도착합니다. 쉬시는 동안.... "
아... 다행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갑니다.
몸을 추스리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진정이 되지 않습니다.
'어쩌지? 어쩌지? '
아버지 대신 가는 벌초 길인데...
일 년에 한 번 가는 벌초 길인데...
모든 생각이 지워집니다.
아무나 붙들고 매달립니다.
" 아저씨! 여기.. 여기.. 병원에 가야하는데.. "
주차 관리를 하시는 아저씨입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아저씨.
"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
" 심장이.. 심장이.. 멎을 것 같아요.. 구급차 좀... "
" 예? 예... 잠..잠깐 만 기다리세요. 금방 불러 드릴께요. "
부리나케 달려가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고개 숙여 무릎을 잡고 버팁니다.
" 하아~ 하아~ 하아~ "
숨이 가쁩니다.
순간 버스에 두고 내린 가방이 생각납니다.
버스로 올라 가방을 내립니다.
책이며, 음료수며, 빵이며
앞 좌석 그물망에 걸어 두었던 것들은
가져갈 엄두를 못냅니다.
" 여기.. 음료수라도 좀 드세요.. "
" 아니요.. 괜..괜찮아요.. "
" 숨은 쉬실 수 있으신거죠? "
" 네... 가슴이.. 가슴이.. 답답해요.. "
요란한 싸이렌 소리.
구급차가 옵니다.
황급히 내리는 구급대원이 묻습니다.
" 환자 어디있어요! "
" 여기.. 서 계신 분인데..."
" 어디가 아프신데요 "
" 심장이요.. 심장이 멎을 것 같아요.. "
심장이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땅히 어디라고 얘기할 수가 없기에.
구구절절히 설명하기에는 남아있는 힘이 없습니다.
" 자! 어서 타세요. "
구급차를 차고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이제는 고향길에 가기는 다 틀렸습니다.
창 밖으로 금강 휴게소라는 팻말이 보입니다.
" 고향 가시는 길이신가 본데.. "
" 예..벌초 가는 길이었어요. "
" 산소 마스크 필요하세요? "
" 아니요. 지금은 괜찮아요. "
' 내가 구급차를 다 타 보다니...'
온갖가지 장비들이 즐비합니다.
생명을 위해 존재하는 장비들...
순간 어느 병원에서 봤던 작은 액자 글이 떠오릅니다.
' 병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갓난 아이와 같다 '
병원에 도착합니다.
뒷 문이 열리고 간호사들이 뛰어 옵니다.
" 환자는요? "
" 여기 있잖아요. "
멍 하니 의자에 앉은 나를 보고서
의아해 하는 표정입니다.
" 어디가 아프신거에요? "
" 심장이 멈출 것 같아서요. "
" 어서 내리세요. "
응급실입니다.
다행히 응급 환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 자! 여기 침대에 누우세요. "
벨트를 풀고
양말을 내리는 것을 보니
심전도를 체크할 모양입니다.
" 며칠 전에 심전도 체크한 적 있는데요. "
" 그래도 다시 해야 되요. "
체온을 재고 맥박을 잽니다.
호흡 수를 계속 확인하면서
심전도 수치를 들여다 봅니다.
" 다시 한 번 말씀 해 주세요. 증상이 어떻다구요? "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되돌려 말합니다.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물으면 말하고 물으면 또 말합니다.
" 일단 안정이 안 되니, 진정제를 놔 드리겠습니다. "
구급대원이 신분증을 가져갑니다.
힘없이 누워 하얀 천정을 바라봅니다.
'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
한심한 생각이 절로 듭니다.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져 옴을 느낍니다.
숨 쉬기도 한결 편해집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다가옵니다.
" 심전도도 이상없고, 맥박도 정상이고...
혹시 집 안에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
" 아니요. "
" 그럼..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든지.. "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
" 음.. 그렇다면 제 생각엔... "
형광 불빛에 빛나는 의사의 안경테가 보입니다.
" 신경 정신과에 가면.. 공항 장애라고 하는게 있는데...
증세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없고 또 지금은 연휴기간이니까
안정이 되는대로 대학병원 신경 정신과를 찾아가 보세요.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신경정신과 의사도 있으니, 응급실로 가시면 될 겁니다. "
" 예.. 알겠습니다. "
" 필요하시면 제가 소견서를 써 드릴 수는 있습니다. "
" 예..그렇게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
응급실 철재 침대에 누워 하얀 하늘을 바라보는 오늘은
추석 연휴 첫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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