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디오나 한 편 볼까?'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가는 중 입니다.
엄마와 함께 길을 가던 꼬마가 넘어집니다.
철퍼덕! 소리도 요란하게.
아픔이 땅을 타고 전해옵니다.
'아프겠다'
아이가 엉엉 웁니다.
아이를 일으키며 엄마가 말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는 울음을 그칠 줄 모릅니다.
"괜찮다니까! 울지마, 뚝!"
엄마 얼굴에 고구마 밭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괜찮겠지.
하지만 아이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인다"
나도 몰래 중얼중얼 합니다.
아이 옷을 털어 주던 엄마가 힐끔 쳐다봅니다.
등줄기에 얼음이 들어간 것마냥 섬뜩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엄마는 분명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넘어진 것이 분명히 괜찮지 않은 듯이
절뚝절뚝 걸어갑니다.
걸어가는 엄마와 아이를 바라봅니다.
재미있는 생각 주머니를 하나 꺼내봅니다.
엄마와 아이가 길을 가다 엄마가 넘어집니다.
꽈당! 소리도 요란하게.
넘어지는 것만 봐도 무릎이 아플정도로.
아이가 말합니다.
"엄마, 괜찮아?"
엄마는 연신 혀 소리를 내며 무릎을 주무릅니다.
"엄마 엄마 괜찮아?"
"아이 정말, 아픈데 말시키지 말아!"
엄마 얼굴에 고구마 밭이 생깁니다.
킥킥 웃음이 납니다.
길을 가다 넘어지면 열 중에 아홉은 아픕니다.
아이가 넘어져도 아프고
엄마가 넘어져도 아프고
누가 넘어져도 아픕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이상한 말 습관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습관처럼 나오는 말.
특히나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나 선생님들은
더욱 그러한 말 습관이 많습니다.
다친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도 하지만
너무 너무 아픈데 '괜찮다?'
상처가 났는데도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현장학습을 갔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한 녀석이 앞장서서 뛰어가고 있습니다.
"이 녀석아! 조심해서 뛰어라. 그러다 넘어질라!"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로 넘어집니다.
엉엉 우는 녀석을 친구들이 데려옵니다.
무릎이 까져서 피가 나고 있습니다.
무릎에 소독약을 발라줍니다.
"많이 아프겠다. 많이 아프지?"
"네"
"살 속으로 뾰족한 게 막 들어오는 느낌이지?"
"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선생님도 넘어져 봤으니까 이놈아!"
피식 피식 웃음이 납니다.
'조심해서 뛰어라?'
생각할수록 우스운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조심해서 뛰는 것은 어떻게 뛰는 것일까?
"아야 아야! 아프다!"
"병균이 들어가지 않도록 소독해 줘야 돼.
그래야 네 스스로 새 살을 만드는데 방해를 안 받지.
몸은 병을 스스로 치료하는 능력이 있어.
시간이 지나서 딱지가 생기면 다 나은 거야.
병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죽은피로 딱지를 만들고
그 속에서 열심히 새 살을 만드는 거야.
새 살이 다 만들어지면 딱지는 저절로 떨어져.
딱지가 저절로 떨어지기 전에 억지로 딱지를 떼면
살은 또다시 딱지를 만드는 일을 해야 해.
그러니까 딱지가 생기거든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
알았지?"
"네. 안 아프려면 기다려야 되는 거죠?"
"그렇지. 잘 아네! 자 다 됐다. 이제 일어나자!"
"그런데, 선생님. 연고는 안 발라줘요?"
"연고? 연고를 왜 바르는데?"
"연고를 발라야 흉터가 안 생기잖아요?"
"그럼, 연고가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전부 흉터 투성이였겠네?
몸은 스스로 치료하는 능력이 있어.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해도.
그런데, 연고를 바르면 그 능력을 연고가 하게 돼.
물론 더 빨리 낫는 것은 좋지만
네 몸이 스스로 낫는 능력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래도 연고를 바를까?
연고라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나을래?
아니면 너 스스로 나을래?"
"나 스스로 나을래요"
"그래. 그래서 연고를 안 발라주는거야.
너 스스로 나을 수 있으니까. 알았지?"
"네"
"자! 그럼 이제 가자."
녀석이 조심조심 걸어갑니다.
'아! 이게 조심조심 이구나!'
엉거주춤 뛰어 봅니다.
"선생님! 왜 그래요?"
"조심조심 뛰는 거야. 조심조심 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이상해요!"
"너희들도 해 봐라. 재미있다!"
달랑달랑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회관으로 갑니다.
비디오 가계 앞에서
교육용 비디오를 한 편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