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눈이 오면 생각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하얀 모자를 쓰고
하얀 귀마개를 하고
하얀 마스크에
하얀 털이 폭신폭신 달린 하얀 외투를 입고
하얀 쉐터에 하얀 장갑
하얀 바지에 하얀 부츠를 신은
눈동자만 까맣던 아이가 생각납니다.
작년 겨울
밤사이 펑펑 눈이 내린 날 아침에
발자욱 하나 없는 옥길동 마당에서
발목을 푹푹 담그며 놀고 있을 때에
눈처럼 하얀 아이가 찾아 왔습니다.
하얀 발자욱을 찍으며.
온통 하얀 아이였기에
아이가 부르기 전에는 다가오는지도 몰랐습니다.
"선생님!"
"어? 너... 누구니?"
"눈이 와서 좋지요?"
"그래. 눈이 와서 참 좋다. 그런데, 넌 누구니?"
"눈이 오면 세상이 온통 하얗게 되서 참 좋아요. 그렇죠?"
"그래. 그런데, 넌 누구니?"
아는 녀석인데 몰라 보는 것은 아닌가 미안해서
조심스럽게 물어 봅니다.
"저요? 저 모르세요? 저는 선생님을 아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너 누구니?"
"저요? 제가 누구냐면요.. 후후"
"그래. 누군데?"
그때였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았던 새가
발이 시려웠던지 푸드득 날아 오릅니다.
나뭇잎이 부르르 가지를 떨며
가지위에 소복히 쌓였던 눈을 털어 냅니다.
"와- 저거 봐요. 나무도 눈을 내려요. 예쁘다!"
어느새 하얀 아이는
하얀 눈이 내리는 나무 밑으로 달려 갑니다.
"저 녀석... 누구지?"
주위를 둘러 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 녀석...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설마 혼자 온 것은 아니겠지?'
아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 갑니다.
뽀드득 뽀드득 발바닥이 간지럽습니다.
"선생님! 전 겨울이 제일 좋아요. 하얀 겨울이 제일 좋아요"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녀석을 바라봅니다.
눈처럼 하얀 녀석이
하얗게 웃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어? 선생님! 저기봐요. 눈꽃이 피었어요"
아이가 달려 갑니다.
'저 녀석, 도대체 누구지?'
궁금해집니다. 온통 하얗기만 한 녀석이 궁금해 집니다.
"누구하고 함께 온거니? 엄마, 아빠는 어디 계시니?"
"선생님! 이렇게 예쁜 꽃 본 적 있어요?"
아이가 내미는 하얀 장갑위에
조각처럼 예쁜 눈 송이들이 있습니다.
"정말 예쁘구나. 조각가가 세긴 것처럼..."
"그렇죠? 예쁘죠? 정말 예쁘죠?"
아이가 웃습니다.
까만 눈동자가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선생님!"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 봅니다.
언제 오셨는지 선생님 한 분이
회관 앞에서 손짓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거기서 뭐하세요?"
"아이랑 놀고 있어요."
"누가 왔어요?"
"예"
"누가 왔는데요?"
"누구냐면요..."
다시금 뒤를 돌아 봅니다.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 이 녀석...어디갔지?'
사방을 둘러 봅니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옥길동 언덕 위로 오릅니다.
주위를 둘러 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이상하다?'
하얀 눈 위에는
선생님의 발자욱만 놓여 있습니다.
회관 앞 입니다.
"누가 왔었어요?"
선생님이 묻습니다.
"온통 하얀 옷을 입은 녀석이 왔었는데
누구였는지 모르겠어요"
"어머? 선생님 옷에 눈꽃이 피었네요?"
하얀 눈꽃이
작고 예쁜 하얀 눈꽃이
온 몸에 가득 피었습니다.
'누구였을까?'
몸에 묻은 눈꽃을 떼어내며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온통 하얀 날에
발자욱 하나 없는 하얀 세상에는
가끔씩 어린 시절 내가 찾아 오기도 한답니다.
평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저는
작년 겨울에 한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린시절의 자신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가슴속에 살아있는
꿈을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혹시나
이번 겨울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다리며
이번에 만나면 꼬옥 껴안아줘야지 다짐하며
하얗게 부서질 하얀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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