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연극표가 들어 왔는데 보실테냐고.
시간이 안 돼서 갈 수 없는데 가실테냐고.
맞선보는 날이라 좋아라 받습니다.
새 양복입고 구겨질까 조심스레 나서는데
전화가 옵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만날 수 없다 말합니다.
사정이 생겼다 합니다.
괜찮다 말합니다.
하지만 안 괜찮았습니다.
싹둑싹둑 이발할 때는 괜찮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갈아 끼울까 말까한 면도날을 갈아끼우며
구석구석 면도할 때도 괜찮았습니다.
손톱, 발톱 정성으로 깎고
아침부터 세탁소 아줌마 졸라댈 때도 괜찮았습니다.
또박 또박 침 발라가며
꼴깍 꼴깍 침 넘겨가며 적은 편지
곱게 접어 호주머니 넣을 때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 괜찮습니다.
넥타이 풀어 옷걸이 걸고
양복 벗어 옷걸이 걸고
들뜬 마음 옷걸이 걸어 옷장에 넣습니다.
"그래도 연극은 봐야겠다!"
옷을 입습니다.
양복아닌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누구하고 보지?"
연극을 봅니다.
다정한 사람과 함께 앉아 연극을 봅니다.
거짓말입니다.
다정한 사람들 함께 앉아 연극을 봅니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극장입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연극을 봅니다.
제목도 거짓말입니다.
'사랑은 거짓말!'
연극을 봅니다.
다정한 사람들 수두룩한 곳에서
맨 귀퉁이 보조석 한 구석에서
기댈 것은 벽 밖에 없는 곳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연극을 봅니다.
혼자 왔다고 자리도 구석으로 줍니다.
혼자 온 것도 그런데 자리까지 그렇습니다.
앞 사람, 옆 사람 힐끗힐끗 쳐다봅니다.
혼자오면 안 될 곳에 혼자 온 것처럼.
연극이 시작됩니다.
'사랑은 거짓말!'
혼자 왔어도 함께 봅니다.
혼자 왔어도 함께 웃습니다.
너무 웃어 앞 사람이 쳐다봅니다.
웃다가 혼자 온 것도 잊습니다.
혼자와도 되는 곳이었습니다.
사람구경을 합니다.
참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딜가나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만 사는 곳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옷
사람들을 위한 가방
사람들을 위한 신발
사람들을 위한 음식
사람들을 위한 악세사리
사람들을 위한 책
사람들을 위한 음악
사람들을 위한 놀이
사람들을 위한 연극
사람들을 위한 도시
가끔씩 보이는 동물들은
사람들을 위해 팔리고 있습니다.
가끔씩 보이는 식물들은
사람들을 위해 심어져 있습니다.
사람도 사는 곳에서
사람만 사는 곳으로 온 기분입니다.
사람도 사는 곳에서
사람만 사는 연극을 보러 온 기분입니다.
재미있습니다.
사람도 사는 곳으로 왔습니다.
사람 하나에
고양이 둘
토끼 하나
강아지 둘
십자매 하나
그리고 셀 수 없는 나무
셀 수 없는 새
셀 수 없는 자연
가끔씩 사람만 사는 곳으로 나갈 때면
사람만 사는 것에 어색함을 느낍니다.
전에는 부담이었는데
이제는 재미입니다.
나도 모르게 더불어 사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것과 더불어.
오늘은 사람구경을 다녀왔습니다.
나도 사람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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