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합니다.
온 몸 묵은 때를 씻습니다.
오늘만큼 자란 수염도 말끔히 깎습니다.
머리도 단정히 빗고 가장 편한 옷을 입습니다.
작은 가방 하나에 수건 두 장을 넣고 집을 나섭니다.
인적 없는 길을 걷습니다.
반 토막뿐인 달 하나만 덩그러니 비추는 밤입니다.
컹 컹 개가 짖습니다.
개 짖는 소리가 온 하늘에 울려 납니다.
금강정사를 찾았습니다.
삼 천 배 철야정진 법회가 있는 날입니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신자도 아닙니다.
신자로 참석한 법회가 아닙니다.
하루에 삼 백 배
매일같이 절을 했던 이유는
나를 채운 나를 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함께 하기로 약속한 분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시간을 잘못 알아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씀과 함께.
죽비 소리에 맞추어
무엇이라 말하며 절을 하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법당은 이미 만원이라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서서 구경만 하는데 절로 허리가 숙여집니다.
자리가 생길 때까지 아래층 법당에서 절을 하기로 합니다.
방석을 깔고
무릎꿇고 허리 펴 앉습니다.
'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으나 내가 편해지기를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편안해 지기를 바랍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모든 것들이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
두 손 합장하여
허리 굽혀 나를 낮추고
무릎꿇고 머리 조아려
나를 비우기 시작합니다.
일 배, 이 배, 삼 배...
백 배가 채 못 되었을 때
윗 법당에서 휴식시간을 알리는 울림이 있습니다.
숨을 가다듬고 짐을 챙겨 큰 법당으로 향합니다.
함께 가신 분의 도움으로
겨우 자리 하나를 마련합니다.
작은 방석하나 겨우 놓을 수 있는.
짐을 놓고 다리 펴 준비를 합니다.
이미 육백 배가 진행된 뒤입니다.
삼 천 배를 채울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일 배를 해도 정성을 다하면 삼 천 배라
만 배를 해도 정신이 흩어지면 헛 짓이라 했음을
위안 삼습니다.
혼자서 천 배
수련하는 곳에서 천 배
이렇듯 천 배 두 번을 한 적은 있었지만
한꺼번에 삼 천 배를 한 적은 없는지라
체력이 버텨줄지 불안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밤 새워 하는 절이라
졸음도 어찌할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걱정, 근심을 떨치러와서
또 다른 걱정을 할 이유가 없기에
옷에 묻은 먼지를 털 듯 떨쳐버립니다.
시작을 알리는 죽비 소리가 들립니다.
죽비 소리에 맞춰
일 배, 이 배, 삼 배...
평상시 하던 절과는 다르게
팔 동작이 없고 허리와 다리 동작만 있어
한결 간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동작으로는 만 배도 하겠다
짐짓 자만심도 품어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만심은
이 백 배가 넘어가면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처음 연습 시
방석이 없어 그냥 하였더니
무릎 살이 짓물러 살이 벗겨진 위로
채 새 살이 굳기 전에
또 다시 상처가 생기고 생겨
뼈가 튀어나온 듯
신경이 돋아난 듯
계속 통증이 있었는데
잘 버티어 줄지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허리가 아파 오고
무릎이 쑤셔옵니다.
숨이 거칠어질 무렵
구백 배가 끝이 납니다.
주위를 둘러봅니다.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여럿이고
입시 생 자녀를 둔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많이 보입니다.
대부분 여자들입니다.
스님 말씀이
남자가 여자보다 힘도 세고
가슴도 넓고 활동도 왕성한 것을
나 또한 여자이나 솔직히 인정 하지만
남자들도 명심하길 이렇듯 정성은 여자들이 더 많이 들이니
남자로서 자부심을 갖되
절대로 자만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하며 스님께서
십 만 배 절 수행을 하시던 말씀을 하시는데
입안으로 계속 숫자만 되뇌어집니다.
십 만 배...
십 만 배...
삼 천 배도 할 수 있을까 힘든 판에
십 만 배 이야기를 들으니
엄두도 안 나는 숫자에
혀만 둘러집니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이 지났습니다.
간단하게 요기를 한 후에
잠시 휴식 시간을 갖습니다.
함께 하신 분께 궁금하여 묻습니다.
" 절... 왜 하세요? "
" 하고 나면 성취감이 있으니까요. "
성취!
참 좋은 말입니다.
성취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함께 하신 분이 하신 말씀은
목적한 바를 이루는 성취(成就)를 뜻하겠지만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내게는
장가들어 아내를 맞는다는
성취(成娶)가 떠오릅니다.
잠시 잡생각을 하다 보니 땀으로 젖은 몸이 서늘해집니다.
또다시 시작입니다.
한 번에 제일 많이 해 본 천 배를 넘어서는 순간
일 배, 이 배 더해질 때마다 신명이 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각마저도 서서히 흩어지며
내가 절을 하는지
절이 절을 하는지도 모르게 절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천 배를 넘어섭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귓불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가
철렁 철렁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가슴이 뻥- 뚫려
바람만이 오고 가는 듯 싶습니다.
어찌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일 배를 마치며 거둔
안도의 한숨만이 기억됩니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5시가 넘었습니다.
삼 천 배를 마치고 예불준비를 합니다.
" 먼저 가 보겠습니다. "
" 차가 없을 건데요? "
" 괜찮아요. 좀 걸으면 되죠. "
인사를 마치고 절을 빠져 나옵니다.
어느새 별이 참 많이도 떴습니다.
눈이 맑아진 듯 검은 하늘이 투명해 보이고
점점이 박힌 별들이 보석처럼 빛납니다.
저 멀리 닭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올 때는 개가 짖더니
갈 때는 닭이 웁니다.
터벅 터벅
갓난 아이 첫 걸음 하듯
한 보 한 보 옮길 때마다
걸음이 곧 환희가 됩니다.
한참을 내려오니
눈앞에 젊은 연인 한 쌍이 보입니다.
서로 부등켜 안고 오는 모양이
키스를 하며 걷고 있습니다.
인기척을 못 느꼈는지 한참을 그렇게 걷더니만
나를 느끼고 겸연쩍은 듯이 대화를 나눕니다.
그 자리에 있음이 못내 미안한 마음입니다.
연인이 지난 뒤로 또 다시 홀로이다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 한 명이 나타납니다.
짧은 미니 스커트에 외투를 걸치고
걸음걸이가 바쁜 것이 추운 모양입니다.
나를 본 후 반 원을 그리며 멀찌감치 떨어져 옵니다.
아마도 내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역시나 그 자리에 있음이 못내 미안해집니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시간은 6시가 됩니다.
땀에 절은 옷을 벗으니
갑옷을 벗은 듯 홀가분해집니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자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모양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세상이 변하길 원하거든
내 자신이 변하라 하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삼 천 배를 마쳤습니다.
늦은 탓에 정확히 채우지는 못했지만
오늘만큼은 새 털 같은 마음으로
잠을 청합니다.
새벽의 희뿌연 손자국이 창에 그려집니다.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번집니다.
사르르 얼음 녹듯
잠 속으로 빨려듭니다.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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