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눈을 뜨니 창밖은 벌써 한낮입니다.
' 이런.. 늦잠을 잤네...'
찬물에 샤워를 하니 머리칼이 쭈삣, 두 눈이 말똥 말똥 떠 집니다. 땀에 절은 옷은 비닐에 넣어 가방에 넣고 차곡 차곡 쌓인 옷 중 가벼워 보이는 옷을 입습니다.
' 어제는 시작부터 무거웠는데 오늘은 가볍게 좀 시작 해 보자!'
모텔에서 10여분을 걸으니 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 어느쪽이건 상관없다. 일단 버스를 타고 봐야지 '
얼마나 기다려야 버스가 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텔 아저씨한테 물어나 보고 올 걸...'
시간이 갈수록 무척대고 움직이는 자신이 한심하다 생각됩니다. 아무리 자유로운 것도 좋지만 시간을 이렇듯 기다리는데 낭비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도 워낙 속도를 높여 달려 괜시리 손을 들었다 가는 손목을 채일까 겁이 납니다. 뜨거운 한낮에 간간히 바람마져 불지 않았다면 불볕더위에 계속 자신을 한탄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지나는 바람에 조그만 종이들이 날아 다닙니다. 심심한 차에 잘 되었다 싶어 종이들을 줏어 읽어 봅니다.
' 강원도 옥수수 판매! 잡숴 보시고 맛 없으면 돈 안 내도 좋습니다'
" 어디서 파는지 알아야 먹어 보기라도 하지... "
눈이 번쩍 뜨입니다. 춘천 콜 택시 전화번호!
'음...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으면 비상수단으로 사용하자!'
종이를 만지작 만지작... 하품이 납니다. 가만히 있어도 끈적이는 날씨에 연신 하품만 합니다.
' 안 되겠다. 택시라도 타야지. '
전화번호가 지워질 만큼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종이를 펼치고 핸드폰을 꾹꾹 눌러 전화를 합니다. 10분이면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다행입니다. 그나마...
택시를 탑니다.
" 어디 가세요? "
어제부터 난감한 질문만 하는 택시기사님들입니다.
" 저기... 버스터미널로 가 주세요. 가장 가까운... "
"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은 춘천 버스 터미널인데, 그쪽으로 갈까요? "
" 예, 그렇게 해 주세요 "
결국 어제 도착한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 강촌..강촌...강촌.. ' 강촌이라는 이름이 계속 되뇌어 집니다. 대학시절 종종 MT를 가곤 했던 강촌.. 춘천에서는 그다지 멀지 않으니 한 번 가 볼까... 강촌..강촌.. 강촌... 드넓은 강이 바라보이고 넓고 넓은 앞 마당에서 쌀을 씻고 공을 차던 생각이 납니다. 갈대 숲도 생각나고 발이 푹푹 빠지던 모래터...
"고맙습니다."
택시에서 내려 터니널 안입니다. 강릉, 속초, 태백 등등... 그런데, 강촌은 없습니다. 여기서는 지척이라 없는 모양입니다.
'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 '
식당을 고르는데도 한참이나 걸립니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을 뿐더러 전부 신발을 벗고 올라서야 하는 마루식 식당밖에 없습니다. 신발을 신는데 오래 걸리는 등산화를 신은 터에 신발을 벗고 신는 곳은 피하고 싶습니다.
' 에이.. 입맛도 없는데, 간단하게 먹어야겠다 '
편의점에 들러 빵과 음료수를 삽니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우걱우걱 빵을 먹습니다.
' 맛도 참 없다... '
지나는 사람들 구경하며 빵을 먹다가 눈가에 비친 햇빛을 피하려 고개를 든 순간 머리 위 피씨방이 보입니다.
'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갈만한 곳을 한 번 골라보자! '
남은 음료수를 마져 마시고 피씨방으로 갑니다.
' 홀로 여행... 그래 홀로 여행이 좋겠다 '
검색어로 홀로 여행을 칩니다. 일본 여행, 대만 여행, 베낭여행 등등등...
' 하긴 나도 베낭을 메고 다니니 베낭여행이긴 하네... '
이리갔다 저리갔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을 때, 펜션 하나가 눈에 들어 옵니다.
자연 경관도 좋은 것 같고.. 아... 게다가 강촌에 있네? 일단 전화부터 합니다.
" 며칠 쉬어 갈까 하는데요... 예... 혼자에요... 예.. 오늘부터요... 아.. 있다구요... 그런데, 근처에 혹시 식사할만한 곳은 있나요?... 예? 해 먹어야 한다구요?... 그럼, 취사도구는... 있다구요..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찾아 뵙도록 할께요.. 예... 제 이름은 김창욱입니다."
헐레벌떡 강촌에 도착합니다. 도착하자 마자 눈에 띄는 것은 쌍쌍이 짝을 이룬 젊은 남녀들.. 심지어 중,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마치 늦은 나이에 못 올 곳을 온 것처럼 뒷 목이 벌겋게 달아 오릅니다.
" 도착했습니다. 예.. 기다리겠습니다. "
많이도 변했습니다. 대학시절 왔을 때는 구수한 시골맛도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 시내 번화가를 떼어 옮겨 놓은 듯 간판이 그득하고 민박업자들만 넘쳐 납니다. 하긴.. 생각 해 보면 15년 전 기억을 더듬고 있으니 그도 그럴만도 합니다.
봉고차가 도착합니다. 내려지는 창문으로 나이드신 할아버지 한 분이 보입니다.
" 혼자 오신 분 맞으시죠? 타세요. "
" 예... 처음 뵙겠습니다. "
옆 좌석에 타기에는 짐이 커서 뒷 좌석에 앉습니다.
" 어떻게 혼자 여행을 해요? 젊은 분이? "
" 예..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잖아요.. "
사실 아직까지는 좋다는 생각이 안 들지만...
" 많이 가야 하나요? "
" 아뇨.. 조금만 가면 되요. 적당히 떨어져 있어요. 한적한 곳에... "
눈 앞에 펼쳐진 북한강을 끼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빨간 옷을 입은 펜션에 도착합니다.
" 어떻게 남자 혼자서 여행을 한데? "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셔서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 아..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혼자 여행하면 좋죠... 뭐.. 여유롭고.. 게다가... "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행히 할머니께서 말문을 열어 주십니다.
" 며칠이나 있다 간다고 했지? "
" 아.. 예.. 오늘 있어 봐서요.. 좋으면 한 일주일정도 쉴려구요.. "
" 그럼..그렇게 하고... 자... 이리루 오세요 "
할머니를 따라 간 곳은 생각보다 좁은 방 한 칸... 열린 창으로 숲이 코 앞입니다. 하지만 영 답답한 느낌..
" 아참... 오늘 있어 보고 생각한다고 했으니까. .윗층으로 올라 갑시다 "
윗층은 아랫층과는 다르게 넓은 마당도 있고 뒷 숲이 훤히 보이는 것이 좋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코 앞에 바로 기차 길이 있어서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불과 5미터도 안되는 곳에서 앉아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창으로는 북한강의 모습이 한 눈에 담겨 절로 가슴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 여기가 훨씬 좋네요. 베란다도 있고.. 베란다에 앉아서 강을 바라볼 수도 있고.. "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
무엇보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편안한 얼굴입니다.
" 예.. 그럼, 여기서 쉬도록 할께요..."
가방을 열고 옷을 꺼냅니다. 하나, 둘, 셋... 참 많이도 가져왔다.. 그러니까 이렇게 무겁지... 책도 꺼냅니다. 한 권, 두 권, 세 권... 도서관 차릴 일 있나.. 책은 왜 이리 많이 가져 왔담? 손수 챙긴 짐이지만 스스로를 탓하기에는 벌써 늦은 일입니다.
무겁던 가방을 툴툴 털어 방 한쪽 귀퉁이에 정리를 하고 난 후 마당에 있는 의자를 가져다 베란다에 앉습니다. 흙 빛을 띤 북한강 줄기를 바라보며 이렇듯 넓은 시야를 갖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있을까 생각합니다. 하루 지내보고 괜찮으면 정말로 한 일주일 정도 머물러야겠다 하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납니다.
' 이런, 빵으로 끼니를 때웠더니 벌써 밥 달라 야단이군... '
펜션에서 식품점까지는 걸어서는 못 갈 거리 그래서, 펜션에서 직접 데려다 주시기도 한다는데 들어오자마자 나가는 것이 죄송스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해서 냉장고에 붙어있는 '배달전문 편의점'으로 전화합니다. 이것, 저것 주문하다 보니 군것질만 잔뜩 하는 느낌...
' 선생님이 이러면 안 되지... 오늘은 하루치만 주문하고 내일은 직접 장을 봐야 겠다.'
어느덧 밤이 찾아 오고 있습니다.
더워서 열어 둔 현관 문 앞으로 빽- 소리와 함께 기차가 지나갑니다. 퉁퉁.. 퉁퉁... 땅이 흔들립니다. 기차가 지나고 난 후 숲에선 다시 풀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큼지막한 하늘소 한 마리가 열린 현관문으로 날아 듭니다.
" 어? 안녕? 반갑다. "
그로부터 하늘소는 이틀을 함께 지내는 친구가 됩니다.
베란다 의자에 앉습니다.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습니다. 넓은 펜션에 불켜진 곳은 단 두 곳. 안내실과 제 방이 전부입니다. 손님이 저 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조용해서 좋습니다.
밤이 되니 강물도 검게 변합니다. 저멀리 놓인 다리 위로 쏜살같이 지나는 차들도 보입니다.
마음에 드는 곳입니다. 며칠이고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 내친김에 안내실로 갑니다.
" 저기... 안녕하세요.. 저.. 일주일 있다가 갈려구요. 그래서.. 미리 말씀 드리려구요..."
"아.. 그래요.. 이리 들어 오세요. 여보, 여기 차 한 잔 좀 내주시구려..."
할아버지와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 아직은 휴가철이 아니라서 손님이 별로 없다우. 우리 손주도 강릉으로 피서를 가고... 그런데, 뭐 하시는 손님이신가? "
" 예? 아.. 예.. 선생이에요. 아이들 가르치는... "
" 아.. 그래요.. 선생님이셨구나.. 그런데, 어째 혼자서 여행을 다니신데? "
" 아..예.. 혼자 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마땅히 같이 할 사람도 없고... 그리고, 책도 보고 글도 좀 쓸 마음으로 혼자 왔어요..."
" 글도 쓰시오? "
" 아.. 예.. 그냥 좋아서 혼자 쓰는 글이에요..."
마침, 할머니께서 따뜻한 차를 들고 함께 앉습니다.
" 여보, 아.. 글쎄, 선생님이라시네? 그리고, 글 쓰시는 분이시래... "
" 아. .그래요.. 어쩐지.. 혼자 다닌다 했더니... 자.. 차.. 드세요..."
" 예.. 고맙습니다..."
" 여기..물..참 좋지요? 이 강이 북한 강인데, 저기 위에 의암댐, 춘천댐, 청평댐에서 흘러 오는 물이에요... 젊었을 때는 소양댐 만들 때 가서 트럭운전도 하고 그랬지..나도.. "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젊은 시절 생각이 나신다는 할아버지.. 마침, 택시 기사님에서 들은 풍월로 소양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수 거듭니다.
" 맞어. .맞어.. 그런데, 그거 알우? 여기를 개발하지 않는 이유? 잘 보시유.. 이 근처에 공장같은 것은 안 보이지요? 이 강물이 서울 사람들 마시는 물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우. 사실 서울 사람들은 춘천 사람들에게 고마워 해야 해요.. 암..고마워 해야하고 말고.. 춘천 사람들이 물을 얼마나 소중히 여긴다구... "
구구절절히 듣기에 마음 편한 이야기를 해 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빙그레 미소가 지어집니다.
" 그래. 필요한 것 있으면 말혀. 내 얼마든지 함께 나가 줄 테니까.. "
"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 그려..그려.. "
해는 이미 저물어 세상은 온통 어둠 천지가 되었습니다. 닫힌 베란다 커다란 방충망 위로 가지 가지 풀벌레들이 붙습니다.
" 안녕? ... 안녕?..... 안녕!.... 일 주일동안 잘 지내자.. "
풀벌레 소리에 묻혀 마음이 귀가 되는 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