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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봉샘의 성장통

퇴근하는 선생님

4년 전 크리스마스 때였습니다.

창밖으로는 흥겨운 캐롤송이 울려 퍼지고

거리마다 오색 등이 휘황찬란한데

모든 것이 그림처럼 손에 닿지 않는 사무실 창 안에는

집 없는 선생님 한 명이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행 건물을 빌려 쓰고 있던 터라

자체 경비가 삼엄한 은행안에서

나갈 수도 들어 갈 수도 없이

연휴에 발이 묶이고 만 것입니다

창을 머금고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들으며

컵 라면으로 크리스마스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YMCA가 이사를 하게 되어 그나마 있던 거처마져

옮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수업하며 일을 하고

밤에는 사무실 바닥에 전기장판을 깔고

애벌레마냥 침낭을 말아 잠을 자야하는 시간이 계속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글프거나 자신을 원망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옥길동에 회관이 섰습니다

땅을 고르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었습니다

집 없는 선생님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창 하나 없는 회관이었지만

창 너머로 고양이가 들락거리는 밤이었지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겨울이었던 2월이었지만

그래도 집 없는 선생님은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잠을 자기 위해 눈치를 볼 일은 없을테니까요

옥길동의 2월은 따뜻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다시 2월이 오면 옥길동에 온지 4년이 되어 갑니다.

비록 유치원 교구와 복사기와 마스터기에 둘러쌓인 방이지만

따뜻한 침대가 있고 포근한 생활이 있고 나의 삶이 있는 공간입니다

봄이면 땅이 살아나는 소리를 들으며

옥길동 회관을 뒤덮는 개나리와 진달래에 행복하였습니다

여름이면 새빨간 장미에 온통 얼굴을 붉히며

회관을 울려대는 매미소리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을이면 시뻘겋게 타오르는 산을 보며

낙엽밟은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겨울이면 밤새 하얗게 부서져 내린 하늘 밟는 소리에

그늘없는 아이들처럼 얼굴 가득 해를 갖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아침이면 재잘재잘 새 소리에 잠을 깨고

밤이면 옥길동 지붕의 달님이 들려주는 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옥길동 하늘에 묻혀있는 동물 친구들도 생각납니다

처음으로 옥길동 식구가 되었던 진돗개 복이

비록 돈에 눈이 먼 불청객에 의해 사라져 버렸지만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친구입니다.

조그만 상자에 들여왔던 강아지 형제 하늘이와 바다도 있습니다

하늘향해 들려진 코랑 기분 좋으면 하늘 향해 드러눕는 하늘이와

진돗개 마냥 충직했던 바다가 생각납니다.

하늘이는 지금도 옥길동 언덕을 바라보며

붉게 녹아 내리는 노을진 저녁 하늘을 향해 컹컹 짖어 대지만

밭에 뿌려진 농약을 잘못 먹었던 바다는

이미 옥길동 바다위로 흘러간지 3년이 되었습니다

토끼도 있었습니다

유난히 눈두덩이 까맣던 토끼 용기와

너무나 작아서 이름마져 꼬마였던 토끼 꼬마와

토토, 하얀이, 푹신이...

토끼들은 겨울이 싫었던지 겨울이 오기 전에

모두 떠나고 말았습니다

카나리아 짹짹이, 십자매 사랑이와 소망이

거북이 엉금이와 느림이

그리고 뒤 늦게 옥길동 식구가 된

고양이 찐득이와 살금이

모두가 다 옥길동과 선생님 가슴에서 살고있는

옥길동 식구들입니다

그 가운데 사랑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옥길동의 꿈을 꾸는 희망이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빛이 되고 생명이 되는 우리네 아이들

이곳이 바로 옥길동입니다

옥길동의 첫날 밤이 생생합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곳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정적속에서

창이 울어대고 천정이 움직이고

바람결에 실려오는

소곤거리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때까지

침묵은 너무나도 무서운 소리였습니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것만 듣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눈과 귀가 열릴 때가지

알 수 없는 짐승에 쫓기듯

침묵은 눈을 멀게하고 귀를 막히게 하였습니다

지금에서 생각하니

내가 침묵을 받아 준 것이 아니라

침묵이 나를 받아 준 것이었습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있는 그대로 살아있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 또다시 2월이 다가옵니다

하늘 그대로 땅이 되는 순백의 눈을 바라보며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땅을 향해 쏫구치는 투명한 고드름

겨드랑이 간지르는 햇님의 따사로운 미소에

힘차게 땅으로 부수어지는 그 웃음이

가슴 져미게 그리워질 계절입니다

.........

이제는 퇴근하는 선생님이 되려 합니다

홀로 계시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려 합니다

더이상 신발신고 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옷을 갖춰 입지 않아도 되고

사계절 모기장을 치지 않아도 됩니다

비가 오면 토끼장을 들여 놓기 위해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되고

고양이, 강아지 저녁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깊은 밤에 라면을 사기위해 먼 길을 걷지 않아도 되고

휴일에도 쉴새없는 옥길동에서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옷장하나 들여놓기에도 비좁은 방이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살고 싶습니다

지난 시간만큼 시커먼 때를 입은 벽을 매만지며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고갔던 복도를 걸으며

누구보다도 큰 집에서 살았던 희망이는

누구보다도 큰 마음을 갖게 해 준 옥길동을 담아

이제는 어느곳에 있어도 옥길동에 있듯

행복하게 살것입니다

이제는 희망이도 퇴근하는 선생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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