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가득한 토요일입니다.
하늘은 여지없이 높고 푸릅니다.
옥길동 마당에 구르는 낙엽들을 모아
가을맞이 나들이를 나갑니다.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 축구 수업을 마칩니다.
호주머니 딸랑 딸랑 동전을 헤아리며
버스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지붕으로 사람들 머리가 튀어 나올만큼
사람들로 꽉찬 버스가 힘겹게 달려 옵니다.
딸랑 딸랑 동전을 놓습니다.
'에이.. 날도 좋은데 오늘은 그냥 걸어가자'
걸어가면 1시간 30분거리..
만원 버스에서 샌드위치 속의 햄처럼 짓눌리기에는
너무나도 기분좋은 가을입니다.
아파트 단지 사이 좁은 길을 걷습니다.
놀이터가 나올 때마다 멈춰 섭니다.
놀이하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미끄럼틀, 시이소, 그네..
어느 동네 어느 놀이터에나 있는 모습이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봐도 좋습니다.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두 녀석을 봅니다.
"형준아!"
"어? 선..선생님.."
3년 전 일곱 살이었던 형준이..
이제는 콧 잔등이 거뭇해질 정도로 훌쩍 자라 버렸습니다.
"오랫만이네.. 잘 지내냐?"
"예.."
"오랫만이네.. 어디 가는 길이냐?"
"예..집에요. .놀다가요.."
"학교 잘 다니지?"
"예.."
"그래..그럼...또 보자.. "
"예.. 안녕히 가세요"
애완 동물을 파는 가게앞에 섰습니다.
앵무새도 보이고, 거북이도 보이고
햄스터도 보이고.. 아.. 챗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도 있습니다.
'그놈 참 귀엽네.. 다람쥐나 두 마리 키워볼까?'
새끼 고양이 살금이가 옥길동에 처음 나타났을 때
고양이를 겹겹이 에워싸던 아이들의 모습이 선합니다.
'다람쥐도 주인공이 되겠는걸?'
혼자서 키득키득 웃고 있는데...
"선생님.. 어디 가세요?"
"어? 슬기구나.."
"감기 걸리셨어요?"
"그래.. 그렇게 되었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걸어가는 길이야. .집에.."
"집이 이 근처세요?"
"아니.. 옥길동..."
"옥길동까지 걸어간단 말이에요?"
"좋잖아? 날도 따뜻하고.. 그런데 너는 어디가는 길이냐?"
"도서관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이요.."
"그렇구나.. 순응이 얼마 안 남았네.. 시험보기 전에 선생님에게 꼭 전화해라.."
"예..알았어요. .선생님..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래.. 또 보자.."
슬기는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작년 청소년 기자단 선생님이였을 때
함께 기자단 생활을 했던 친구입니다.
슬기덕에 다람쥐를 잊어 먹었습니다.
마스크를 고쳐 쓰고 길을 갑니다.
길을 가던 한 가족이 길을 막고 팔을 붙듭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1학기 때 토요일 마다 축구를 했던
슛돌이 축구단 녀서과 엄마, 아빠를 만났습니다.
"선생님. .축구 시작했어요?"
"예..오늘이 첫 수업이었는데요.."
"어머..그런데.. 연락을 못 받았어요.."
"어? 그럴 리가 없는데.. 다 연락했는데.."
"그래요? 제가 전화를 못 받았나 보네요..가서 등록하면 되나요?"
"예.. 이번 주에 오셔서 등록하세요.."
"예..그럼 다음 토요일에 뵐께요.."
"그러세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오르막 길을 오릅니다.
광명 시립 도서관 앞을 지납니다.
월드 맨션이 보입니다.
'저곳에는 지웅이가 사는데.. 지금도 살고 있을까?'
담임을 하면서 선생님 마음에 웃음 보따리를 심어 줬던 녀석입니다.
한참을 올라서는데,
"어머.. 선생님. .아니세요?"
유모차를 열심히 밀고가던 학부모를 만납니다.
"아..예... 안녕하세요.. 어? 그런데.. 왜 차도로 다니세요?"
"예. 인도가 좁아서요.."
유모차도 차인가? 재미있는 생각으로 피식 웃는데
"그럼..먼저 갈께요. .선생님.."
"예..조심해서 가세요.."
오르막길을 올라서자 건너편에서 손을 잡고 오는 아빠와 아이가 보입니다.
우리반 창근이와 창근이 아빠입니다.
운동회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창근이..
"어디 가세요?"
"어? 선생님이 여기 왠일이세요?."
언제나 허리 굽혀 정중하게 인사 하시는 아버님..
"예.. 옥길동 가는 길이에요.. 창근이는 어디가니?"
"아..예.. 전주 시골집에 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이 녀석.. 입술위에 뭐를 발랐니?"
"운동회 때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
"그렇구나.."
"그럼..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아.. 예.. 안녕히 가세요.."
내리막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파트 울타리 사이로 배드민턴 채를 든 엄마와 아이가 보입니다.
배드민턴 공이 나뭇가지에 걸렸는지
연신 나무를 흔들어 대더니
결국에는 배드민턴 채를 위로 던집니다.
엄마와 아이가 서로 툭 툭 쳐가며 배를 잡고 웃습니다.
배드민턴 채까지 나뭇가지에 걸리고 맙니다.
'어떻게 꺼낼까?'
궁금하면서도 가던 걸음을 멈추진 않습니다.
햇살 좋은 가을 날 오후에
옥길동으로 가는 길 위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사 나눕니다.
터벅 터벅 걷기에도 따사롭고
우연히 만나는 사람마다 더 없이 반가울 수 밖에 없는
이 가을은 그만큼 좋은 계절인가 봅니다.
혹시.. 길 위에서 만난 그 사람들이
따사로운 이 가을이 아닐까..
옥길동 언덕에 올라서며 뒤돌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