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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학교

놀이가 곧 공부입니다.

① 학습은 협의의 공부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이 어린이에게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실제로 공부라고 하기보다는 반복이나 암기에 의한 단순 학습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습을 좀 더 다양하게, 단계별로 진행한다 하더라도 학습이라는 협의의 공부가 전체 공부를 포괄할 수는 없습니다. 한글 학습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사과라고 하는 글자를 가르친다고 할 때 먼저 사과라는 것을 아이가 만져보거나 먹어보거나 본 경험이 있다면 사과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하더라도 맛이 느껴지고 만져지고 색이 보이는 사과를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기호로 만들어진 사과라는 글자를 실제 있는 것처럼 떠올리며 사과의 향을 기호에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사과라는 글자는 단순히 기호로 만들어진 글자가 아니라 형태가 있고 색깔이 있고 맛이 있는 사과가 되는 것입니다. 양파라는 글자를 대하면 양파를 접한 경험에서 글자에서 시린 맛을 느껴 실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글이라는 것을 단순히 기호로서만 바라보게 하지 않으려면 이러한 다양한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물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이름까지를 포함한 이러한 구체적인 경험들은 아이들에게 있어 글자 학습보다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공부인 것입니다. 단순히 글자를 알게 하려는 목적에서 한글을 가르친다면 나무 한 그루를 위해 숲 전체를 소홀히 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② 풀씨는 실제로 공부를 많이 합니다!!
실제로 풀씨 학교에서 아이들은 공부를 많이 합니다. 색종이 하나를 접더라도 네모난 색종이에서 ' 학 '이 나오는 방법을 배우는 것보다는 한 번 한 번 접어 가는 과정에 포함되는 아이의 노력과 이해, 친구와의 관계를 먼저 배우는 공부를 합니다. 결과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과정이 쌓인 결과를 얻는 공부를 합니다. '학' 이라는 결과를 위해서는 단순한 한 가지 방법만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들이 쌓인 가운데 '학' 이라는 결과 또한 나왔다면 ' 학 ' 뿐만 아니라 저고리, 상자, 배 등 여러 가지 결과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유아 시기의 교육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단순히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 가능성 '에 대한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육은 색종이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다른 존재(식물, 동물, 친구, 어른 등)에 대한 공부로 이어집니다. 유아 시기의 공부는 단순한 암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한 한 가지를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복잡하고 많은 관계들을 맺어 갑니다. 교육 중에 만나게 되는 사물과 생명과의 관계 맺기는 학습을 포함한 공부를 바라보는 아이의 태도를 형성하기에 지식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시기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일찌감치 하나를 담?위해 하나 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그친다면, 둘 이상을 담는 순간부터는 아이에게 공부에 대한 부담을 계속 주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가르치는 것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풀씨 학교에서는 유아시기에 필요한 교육을 하며, 참으로 많은 공부를 함께 합니다.

③ 풀씨 학교 공부의 구체적인 실 예
⑴ 스스로 만드는 놀이 감과 함께 하는 놀이
 가족이 핵가족화 되기 시작하고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이 많아지면서 아이들이 혼자 서도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점 점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기교육 열풍이 사회를 휩쓸면서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구들도 찾아보기가 힘들어져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혼자서 하는 장난감 놀이는 일방적인 놀이 형태를 의미합니다. 일방적인 놀이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혼자서 놀이하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을 모아 놓으면 장난감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터가 되고 맙니다.
장난감은 놀이 감이 되어야 합니다. 놀이 감은 놀이를 하기 위한 재료가 되어야지 놀이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놀이에는 혼자서 놀더라도 대상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특히, 모든 사물에 의인화가 이루어지는 유아시기에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풀씨 학교에는 자기중심적인 장난감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장난감이 없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놀이 감에 따라 함께 놀 친구들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노는 놀이를 통해 놀이 감을 스스로 만들어 갑니다.
놀이 감은 장난감처럼 항상 일정한 모습, 일정한 상태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요즘 나오는 장난감들은 놀이를 할 어린이들의 성별과 나이, 인원 수 조차도 장난감이 결정하도록 만들어져 나옵니다. 성의 구분이 확실한 장난감들과 심지어 인원수까지 결정하는 장난감들은 아이들이 서로에게 다가할 기회조차 주지 않습니다.
풀씨 학교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놀이를 통해 스스로 놀이 감을 만들고, 놀이 감을 통해 친구관계를 더욱 확고하게 맺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풀씨 아이들이 하고 있는 공부 중 하나입니다.

⑵ 서로 비교하지 않고 나와 비교하기(소중한 나!)
아래의 동시는 7세 반 어린이들의 ' 도시락 메모 '로 보내 온 동시 중 하나입니다.

 엄마도 신경질 나지?
 권오삼
 너 옆집 현철이 좀 봐라
 공부를 얼마나 잘하니?
 아래 집 영민이 좀 봐라
 얼마나 말 잘 듣고 착하니!

 그런데 엄마, 제발
 누구누구 좀 봐라, 하지마!
 그 말 들으면
 얼마나 신경질 나는지
 엄마도 당해 보면 알거야!

 엄마!
 옆집 현철이 엄마 좀 봐!
 함부로 욕하고 야단치지 않잖아!
 아래 집 영민이 엄마 좀 봐!
 날마다 잔소리하지 않잖아!

 거봐! 누구누구 좀 봐, 하니까
 엄마도 신경질 나지?
 그러니까 앞으로
 ' 누구누구 좀 봐 ' 하는 말은
 절대 하지마, 응!

동네에서는 동네 친구들과 비교하고, 가정에서는 형제· 자매들과 비교하고, 학교에서는 학교 친구들과 비교하고, 심지어 엄마·아빠 어렸을 적 모습과도 비교하고...
' 나는 우리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절대 비교하지 않아! '라고 확신하시는 부모님! 정말 비교하지 않고 계신가요?

7세 어린이들은 줄넘기를 합니다.
줄넘기를 할 때, 한 번을 넘는 아이들도 있고 열 번을 넘는 아이들도 있고, 백 번을 넘는 아이들도 있고, 하나도 제대로 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일찌감치 줄넘기를 배운 아이들도 있고 줄넘기를 처음 접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줄넘기를 접한 시작이 서로 다른 만큼 줄넘기를 넘을 수 있는 능력 또한 다릅니다. 아이들마다 운동신경이 다른 만큼 줄넘기를 할 수 있는 단계 또한 다릅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아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줄넘기를 할 때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아이들을 서로 비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비교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비교하여, 줄넘기를 잘 하는 아이들은 자랑하듯 넘고 잘 못 하는 아이들은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비교 안에서는 줄넘기를 한 번도 하지 못하던 아이가 스스로 노력하여 다섯 번을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잘 하는 아이들에 비하면 역시 못 하는 것이 되기에 한 번도 하지 못하던 아이가 다섯 번을 하게 된 것 역시 못하는 것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비교는 자기 자신과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신과의 비교 안에서는 단 한 번의 줄넘기라도 큰 성장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성장은 다음 성장을 위한 자신감으로 나타나 두 번, 세 번 하는 것은 한결 쉬어집니다. 자기 자신과의 비교 안에서는 누구나 잘 하는 어린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말 중에 ' 제일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 제일 '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아이들을 서로 같은 아이들로 만들기도 합니다. 서로 같은 아이들 속에서 하나 뿐인 으뜸으로 쓰일 경우 한 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아이들은 열등의식을 갖게 됩니다.
풀씨 학교의 교육은 ' 제일 ' 잘 하는 어린이가 아닌 누구나 잘 하는 어린이와 함께 합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모습을 살려주고, 그 모습 속에서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감을 배워 나가는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의 특별함과 소중함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⑶ 충분히 놀기
 '논다'라는 말은 놀이를 하거나 하여 즐겁게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놀이라는 말은 노는 일을 뜻합니다. '논다'라는 말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다, 게으름을 피우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놀이가 일이 아닌 어른이 놀고만 있을 경우에 자주 쓰는 말입니다. 어른의 경우에는 놀이가 일이 아니기에 어른이 놀기만 할 경우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린이의 경우에는 놀기가 바로 일입니다. 어른이 충분히 일하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하는 것처럼 어린이도 충분히 놀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린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나 교사의 보호를 받습니다. 이러한 보호는 스스로 가치관을 정립 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보호를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어떠할까요?
어린이들은 노는 일에 있어서도 어른의 보호를 받습니다. '놀기'는 문법상의 의미로 동사이며, 스스로 하는 자동사입니다. 스스로 하지 못하는 놀이는 놀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스스로 하는 놀이에 대한 보호는 보호가 아닌 간섭이지 않을까요?
충분히 놀지 못한 어린이는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고,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어린이는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적당한 때가 있기 나름입니다. 지금 현재 어린이들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놀아야 합니다.
다행히 어린이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스스로 놀기를 원하며, 충분히 놀기를 원합니다. 부모인 우리가 어른인 우리가 어린이에게 해야 할 보호는 스스로 놀 수 있도록, 충분히 놀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⑷ 이야기 나누기(다툼)
 풀씨 학교 어린이들은 놀이를 많이 합니다. 놀이를 통해 배우고 놀이를 통해 성장합니다. 어린이들의 놀이가 계속 이어지다 보면 놀이의 형태 또한 점점 바뀌게 됩니다. 혼자만의 놀이에서 함께 하는 놀이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함께 쓰는 공간으로 놀이는 보다 크고 넓어집니다. 이러한 가운데 자연스럽게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사물과의 관계, 다른 생명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어른들과의 관계들이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관계 맺기를 통해 나와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되고, 그럼으로 다툼과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풀씨 학교에서의 이야기 나눔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아니라 이러한 놀이 속에서 관계 매듭을 풀어 가는 이야기 나눔입니다.
다음은 다툼을 해결하는 풀씨 아이들의 실제 모습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자유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주로 나무나 플라스틱 블록을 이용한 놀이나 뛰어 노는 놀이를 하고, 여자아이들은 같은 놀잇감을 가지고서도 보다 아기자기한 집짓기 놀이나 소꿉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집짓기를 하던 녀석들 둘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한 녀석은 울고 있고 또 한 녀석은 울고 있는 녀석을 뚫어져라 째려보고 있습니다. 그 주위에 삼삼오오 놀던 아이들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 등장인물: 선생님, 우는 아이(A), 째려보는 아이(B), 함께 놀던 아이(C, D),

선생님: 왜 울어?
A: (울먹이며) 쟤가 소리 질렀어요.
B: (큰소리로) 내가 언제! 난 그냥 말한 건데... 그렇다고 우냐!
A: (울먹이다가 조금 큰 소리로) 소리 질렀잖아.
B: (고함을 지르다시피) 소리 안 질렀어!
C: (갑자기 끼어들며) 쟤는 소리 지르면 울어.
B: (화 난 목소리로) 네가 어떻게 알아!
C: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랑 놀 때도 그랬어.
'B' 가 'C' 도 째려봅니다.
B: (C를 향해) 나는 소리 안 질렀다~
A: (다소 자신감을 얻은 듯) 소리 질렀어~
B: (더욱 큰 소리로) 소리 안 질렀어!!
D: (끼어 들며) 소리 지르네~
'B' 는 'D' 와 싸운 것처럼 'D' 를 째려본다.
B: (억울하다는 듯이) 왜 나한테만 그래!
선생님: 그런데... 소리를 질렀건 안 질렀건 왜 그렇게 하게 된 건데?
B: 얘가 내 자리로 넘어 왔어요.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한 거에요.
C: 살살 말해도 되잖아~
B: 살살 말했어!!
D: 소리지르네~
B: 또 다시 'D'를 째려본다.
선생님: 선생님 생각에 지금은 화가 나서 그러는 것 같애.
B: (분이 안 풀렸다는 듯이) 맞아요
선생님: 그런데, 너는 소리를 안 질렀다고 생각해도 말을 듣는 건 쟤니까 쟤는 소리를 지른 것처럼 들을 수 있지도 않을까?
A: 맞아요.
선생님: 서로에 대해서 잘 알면 이런 싸움은 없을 것 같애. 소리 지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 말하기 전에 생각하게 될 것이고 또, 쟤는 소리 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리 지르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면 소리 지른다고 해서 울지도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럴까?
C: 그게 잘 싸우는 거에요?
선생님: 그렇지~ 잘 싸운다는 것은 한 번의 싸움으로 친구에 대해 한 번 알게 된다는 거지. 싸워서 미워하게만 된다면 그건 못 싸운 거지...

'A' 와 'B' 는 한 번의 싸움으로 적어도 한 번 만큼은 친구에 대해 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이들의 마음이, 입이 그것을 말해 주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아이들이 관계를 풀어 가는 과정을 선생님이 방해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예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아이들 스스로 관계를 풀어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바라 봐 주셨으면 합니다.


⑸ 공부에 대한 학부모님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목적은 어린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실 분은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행복한 미래는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은 왜 서로 비슷하고 심지어 똑같기까지 할까요?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안심은 결코 안심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이가 똑 같은 과정을 겪는 아이들 중 한 명이 되기 위해서는 아프게 깎아내고 참아내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기도 하고, 스스로 가지고 태어나기도 한 자기만의 모습이 뒷전으로 밀린 어린이들은 결코 그것을 인정해 주는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기준으로 평가되는 이러한 공부를 한 어른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부를 하였기에 이러한 공부가 안심이 되는 어른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을 받았기에 이러한 교육의 틀을 쉽게 뿌리치지도 못하는 어른이기도 합니다.
시기에 맞는 적절한 공부를 아이들이 스스로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교육을 받은 부모나 선생님들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반드시 꼭 해야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꼭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현재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초등학교에 적응하기 위한 학습이 반드시 이 시기에 꼭 해야하는 교육인지 아니면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우리 아이가 뒤쳐질까봐 하는 교육인지 잘 생각 해 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남들 다 하는 학습을 하지 않는다 하여 과연 우리 아이가 뒤쳐지게 되는 것인지도 잘 생각 해 봐야 하겠습니다.

⑹ 발레, 태권도, 수영과 같은 몸을 움직이는 학습은 괜찮지요?
기능 익힘을 먼저 생각하는 교육은 유아시기에 적절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두 발 자전거를 예로 들겠습니다.
두 발 자전거를 못 타던 어린이가 두 발 자전거를 타게 될 때 갖게 되는 성취감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또 다른 무엇을 시도하게 될 때에 이러한 성취감이 큰 힘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신중히 들여다봐야 할 것은 이러한 성취감을 얻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다 같이 배우게 된다면 모든 아이들이 동시에 똑같이 자전거를 잘 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혼자서 잘 타는 녀석도 있을 테고 며칠을 연습해도 제 자리 걸음만을 하는 녀석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과정에 놓인 어린이들에는 서로 다른 격려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친구와 비교하여 뒤쳐지더라도 이러한 것에 기죽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게 하면서 하나의 과정을 완성하여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주고 매 순간 다른 격려가 필요합니다.
과연 현재 유아를 대상으로 기능을 가르치는 곳에서 이러한 격려와 기다림의 시간들이 충분히 주어질까요? 또한,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을 학부모님께서는 갖고 계신가요?
여러 가지를 할 줄 알지만 어느 것 하나 잘한다 생각하지 못 하는 어린이보다는 한가지라도 스스로 잘 한다 자신을 내세울 줄 아는 어린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유아 시기는 여러 가지를 배울 때가 아니라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충분한 자신감을 갖도록 할 때라 생각합니다.

⑺ 생명과 베품이 살아있는 노작시간과 감사함이 충만한 점심시간
힘들여 일하는 것을 '노작(勞作)'이라고 합니다. 쉬엄쉬엄 놀면서 하는 것은 노작이 아닙니다. 땀 흘려 일한 만큼, 매일 매일 사랑과 관심을 쏟은 만큼 딱 그 만큼의 댓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노작입니다.
풀씨 학교는 노작을 생명(生命)노작과 생활(生活)노작으로 나눕니다. 생명노작은 땅을 통한 노작입니다. 생활 노작은 말 그대로 생활 속의 노작입니다. 놀기가 생활인 아이들이 힘들여 일해야 하는 노작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놀기도 바쁜 어린이들에게 풀씨 선생님들은 노작 시간을 어떻게 갖고 계실까요?

- 생명 노작
3월: 울퉁불퉁 파도 마냥 물결치는 황토 땅에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보입니다. 여기저기서 날아온 쓰레기들도 있고 아이들이 놀다 잊고 간 물건들도 있습니다. 흩어진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모닥불을 밝힙니다. 따뜻한 불길에 아이들이 계속 탈 것들을 주워옵니다. 출출해진 녀석들이 집에서 고구마를 가지고 와서 모닥불에 구워 먹기도 합니다. 며칠을 계속 하다 보니 어느새 밭이 깨끗해집니다.
4월 초: 아이들이 땅 놀이를 합니다. 손으로 파기에는 딱딱한 땅, 선생님이 호미로 삽으로 파는 것을 본 후 너도나도 호미를 달라합니다. 삽을 달라합니다. 땅 속에 무엇이 있길래 너도나도 땅을 파는지... 어느새 울퉁불퉁 딱딱한 땅들이 전부 흙을 토해냅니다. 호미 질도 연습하고 삽질도 연습하고 땅도 이제 새 봄을 맞을 준비를 마칩니다.
4월 말: 아이들이 오지 않은 새벽. 경운기가 밭을 일굽니다. 아이들이 뒤집어 놓은 흙 위로 경운기가 다시 흙을 토해 냅니다. 누런 황토 흙이 참으로 예쁜 빛깔입니다.
 호미가 손에 익은 아이들이 두렁과 이랑을 만듭니다. 호미가 성에 안 차는 녀석들은 너도나도 삽을 잡습니다. 밭 가운데 조그마한 산들이 생겨나고 또다시 울퉁불퉁... 하지만 이제는 땀으로 만들어진 땅입니다. 볼록 솟은 산 위에 손가락으로 콕~ 하고 구멍을 내고 씨를 뿌립니다. 설렁설렁 흙을 덮고 조그만 엉덩이를 움직여 또 다시 콕~ 손가락을 찌릅니다. 어느새 모든 밭에 씨를 심었습니다. 옥수수며, 콩이며, 상추며... 아이들의 손길에 삐뚤빼뚤.. 하지만 어느새 땅을 비집고 살아나는 생명들입니다.
5월: 밭 가운데 앉아 조그만 생명들을 바라봅니다. 열심히 손을 비벼 따뜻해진 손바닥으로 조그만 생명들을 감싸며 사랑을 전합니다.
" 사랑해!! 건강하게 자라야 해! "
이제는 풀도 뽑아야 하는데 똑같은 생명인데 누구는 키우고 누구는 뽑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람들이 먹기 위해 가꾸는 생명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저절로 자라나는 생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쓰임이 되는 풀은 쓰임이 되도록 하고 뽑아서 던져두어도 죽지 않아 살아나는 생명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어른 서넛이면 한 순간에 뚝딱일 수 있는 일이지만 아이들과 함께라면 시간도 더디고 하나하나 뽑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 심거나 미안함을 전해야 합니다. 밭 옆으로 옮겨도 잘 자랄 것이라 믿으면서...

열심히 놀기만 하는 아이들은 열심히 생명도 가꿀 수 있습니다.
놀이든 일이든 하고 싶어야 하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풀씨 학교 생명 노작은 아이들이 하고 싶도록 하고, 아이들이 하고 싶어서 하도록 합니다.

- 생활 노작
풀씨 학교는 아이들이 주인(主人)인 학교입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교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더러우면 청소하고 고장나면 고치고 하는 것도 주인의 일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풀씨 학교의 주인은 주인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가끔씩 학교에 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학교의 주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내가 학교의 주인인 줄 안다면 재미도 친구도 놀이도 내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물론 풀씨 학교 어린이들은 주인이면서 주인으로서 해야 할 것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하지 못하면 선생님이 부모님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도움 중에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 하도록 돕는 것이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또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 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못함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잘 하지 못하더라도 잘 하기 위해서, 스스로 하기 위해서 겪는 과정이므로 이러한 과정에는 다시금 도전할 수 있는 격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잘 하기 위한 격려는 어떻게 주어져야 할까요? 격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풀씨 어린이들이 학교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하는 일 들이 바로 ' 생활노작' 입니다. 생활노작은 큰 의미의 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큰 의미의 놀이에는 놀이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놀이를 하기 전과 놀이 이후의 과정이 모두 포함됩니다.
새롭게 생긴 진흙놀이를 통해 큰 의미의 놀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밭으로 가는 길목에 진흙 밭이 하나 생겼습니다. 초등학교 형들인 볍씨 형들이 벼를 심기 위해 논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런 황토 흙이 물을 먹어 질퍽질퍽해진 모습을 본 순간 재미있는 생각에 빠진 풀씨 아이들...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것을 던져 봅니다. 질퍽거리는 모양과 소리에 재미가 솔솔 새어나옵니다. 조심조심 진흙 밭으로 들어갑니다. 온 몸이 질퍽거리는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납니다. " 거기서는 놀면 안돼. 거기는 형아들 논이야~ " " 진흙 놀이 재미있는데! " " 우리도 논 있으면 좋겠다~ " " 우리도 진흙 밭 만들자~ " 비 온 뒤 물렁해진 땅 위로 삽을 꽂아 흙을 퍼냅니다. 아이들의 삽질은 건져내는 것보다 흘리는 것이 더 많지만 아이 손이 무섭다고 하다보면 어느새 모양새가 납니다. 보기에도 좋고 놀기에도 좋은 진흙 밭이 만들어졌습니다. 자~ 이제 놀면 되는데... 황토 물에 옷이 젖으면 어떻하지? 신발은? 선생님의 제안으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고 진흙 놀이가 시작됩니다. 살금살그 조심조심 시작된 놀이이지만 머리에 얼굴에 진흙물을 뒤집어쓰고 나면 첨벙첨벙 물놀이가 됩니다. 온 몸에서 진흙물이 흐릅니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한바탕 신나게 놉니다. 놀이가 끝나고 나면 이제 씻을 시간입니다.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하고 젖은 옷을 벗어 세탁기에 넣고 마른 옷을 입습니다. 여기저기에 진흙물이 떨어져 있습니다. 큰 걸레로 닦고 마른 흙을 비로 쓸어 내는 것도 아이들 몫입니다. 세탁한 옷들을 세탁기에서 꺼내 물기를 털고 빨래 줄에 너는 것도 아이들 몫입니다. 한나절의 진흙놀이는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아이들의 손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과정이 포함된 놀이가 바로 생활노작입니다.

◎ 풀씨 학교 생활 노작 예:
 물 아껴 쓰기, 맨 발로 다니기, 청소, 설거지, 바느질, 못 박기, 놀이 만들기, 정리정돈, 공동 물건 아껴 쓰기 등

- 감사함이 충만한 점심시간

'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서로 나누어 먹는 것! 정말로! '

풀씨 학교 가족이면 누구나 다 아는 '밥 가'입니다.
하늘같은 밥을 대하며 생명에 대한 존중과 쓰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한 하늘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처럼 하늘같은 밥을 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밥은 숨처럼 거르지 않고 먹어야 하는 것이기에 한 번을 먹더라도 잘 먹어야 합니다.
밥을 잘 먹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아 있기 위해 먹는 다는 것은 자동차를 가게 하기 위해 연료를 넣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자동차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는 사람이지 자동차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단 한 번 밥을 먹더라도 연료처럼 먹지 말고 생명으로 먹어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먹는 우리들은 열심히 살아 온 그 생명의 쓰임이 헛되지 않도록 다른 생명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풀씨 학교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감사함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생명에게 감사하고, 우리의 먹거리가 되어준 생명들을 열심히 가꾸어 주신 분들과 또한 이러한 생명으로 좋은 먹거리를 만들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여 이 음식을 먹고 널리 다른 생명들에게 도움이 되고 나눔을 주는 좋은 생명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좋은 삶을 함께 만들어 갈 친구들에게 먼저 나눔의 연습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하고 있는 ' 선분식 '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감사함뿐만 아니라 나를 낳아주시고 돌봐 주시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도 잊지 않습니다. 풀씨 학교에서 진행하는 ' 도시락 메모 ' 는 바로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과 마음을 입이 아닌 가슴으로 먹는 시간입니다. 이렇듯 감사함으로 충만한 점심 시간이기에 생명을 대하는 태도 또한 함부로 일 수 없습니다. 먹기 싫으면 버리는 생명이 아니라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먹고, 꼭꼭 천천히 씹으며 그 생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생명의 쓰임대로 살아 갈 힘을 얻게 됩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삶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풀씨 학교에서는 밥 먹는 시간보다 밥 먹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생명에게 배워야 하는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자연스러움입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조급하지 않고 여유롭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결코 서둘러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생명을 먹을 때도 조급하게 먹어서는 안 됩니다. 천천히... 많이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천히 그 의미를 잊지 않고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장기 아이들에게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지만 자동차에 연료를 넣듯 무작정 넣는다면 자동차 마냥 무작정 달려가기만 할 뿐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게 될 것입니다.
풀씨 학교 점심시간은 양이 아닌 생명의 쓰임을 생각하며 생명이 자라듯이 천천히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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