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똑 같은 것이 하나 이상 있을까요?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는 신발은 그 모양 그 빛깔이 정말 똑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결코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물며 부모도 다르고 태어난 환경도 다른 아이들은 얼마나 다를까요? 달라도 한참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툼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아이들끼리의 다툼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당연한 다툼이 아이들 사이에서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일어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아이들이 많으니 하루 종일 다툼만 일어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 입장에서는 다툼이 없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다툼이 없는 날을 편안한 날이라 믿습니다.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때 비로소 부모님과 선생님은 아이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툼이 없는 것을 곧 서로에 대해 완전한 이해가 이루어진 것 마냥 흡족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어른들의 속 좁고 한치 앞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생각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툼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툼이 생기지 않을 때 유심히 지켜봐야 합니다.
다툼이 생기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예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서로 부딪힘이 생기지 않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 관계라는 것이 전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부딪힘이 생길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자기 놀이에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지켜볼 때 이러한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이러한 경우 부모님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은 다툼이 없었구나' 하고 상황에 맞지 않는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놀이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함께 놀면서 사이좋게 놀았다고 칭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또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은 서로 관계형성이 되지 않는 놀이를 선택하려고 하는 경우도 계속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한 명의 아이만 있는 경우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일방적인 관계형성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두 명의 어린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놀이를 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한 명의 어린이가 주도를 하고 나머지 한 명의 어린이는 주도하는 어린이에게 이끌려 놀이를 하고 있다면 다툼은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서로 사이좋게 노는 모양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주도성이 없는 어린이가 주도성이 있는 어린이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는 놀이이므로 관계형성이 결코 올바르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도 부모님은 섣부른 칭찬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경우에서의 칭찬은 오히려 주도성이 없는 어린이가 칭찬을 받기 위해 계속 주도성을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이좋게' 라는 말보다는 놀이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특히 주도성이 없는 어린이가 놀이를 재미있어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관계형성이 원활한 놀이에서는 주도성이 일방적으로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놀잇감이 왔다 갔다 하듯 주도성도 주고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관계형성이 원활한 경우입니다. 마찰이 심한 두 어린이가 놀이를 할 때에도 충돌 없이 놀이를 잘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적절한 칭찬은 아이들에게 적절한 관계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게 되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또 다시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되돌아 볼 수 있는 관계의 모습이 되기 때문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이때의 어린이들의 관계형성 모습을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늘 이러한 모습을 바래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서로 다른 아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놀이를 할 때에는 다툼은 생길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다툼은 곧 충돌을 의미하며 충돌은 곧 충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충격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이러한 기회의 순간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 간의 갈등을 나 몰라라 하거나 일방적인 부모의 판단만으로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이들 간의 갈등은 상황에 따라 관계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갈등이 어떠한 종류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또한 갈등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이나 부모 생각에 합당하든 합당하지 않던 간에 아이들은 그러한 이유로 갈등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잘 해결될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 선생님 입장에서는 참으로 행복하고 감동스럽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자기의 상황을 이야기함으로써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있는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입장만을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툼이 생겼을 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어른이 아닌 어린 아이가 거기에 덧붙여 마음 가득 억울함까지 가득 차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이러한 상황에 놓인 어린이의 마음보다는 이러한 상황에 집중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곧잘 어린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양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 너는 왜 다른 사람 입장은 생각해 보지 않니"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어린이 마음속에는 억울함이 더욱 크게 자리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는 상황에 대한 생각과 함께 억울한 감정이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화가 날 때나 슬플 때는 이러한 생각과 감정을 더 구분하기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화가 날 때나 슬플 때에는 특히 더 생각과 감정을 분리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곧 다툼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다툼을 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각각 들어봅니다.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때린 것도 상대가 먼저고 화를 내거나 나쁜 말을 한 것도 상대가 먼저입니다. 선생님이 직접 보지 못했다면 누가 먼저 그랬는지 말을 들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상대가 먼저 했다고 말하는 것은 먼저 하는 것이 나쁘고 나중에 한 것은 먼저 한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생활습관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방법은 어른들의 다툼에 있어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방법입니다. 사정없는 사람 없고 사연 없는 무덤 없듯이 말을 듣다보면 도대체 시시비비를 가리기 힘이 들기 때문에 만들어진 어른들의 다툼 해결 방법인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어린 아이들의 다툼에도 고스란히 내려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 싸움과 아이 싸움에서 확연히 다른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른 싸움을 중재하는 것은 규칙이고 법이지만 아이 싸움을 중재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경찰관이나 재판관과는 다른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 말도 수학공식처럼 정형화되기 일쑤입니다.
" 쟤가 먼저 그랬다고 너도 꼭 그래야 하니? "
그럼, 나를 괴롭히는데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이것도 참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 누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니? 너도 똑같이 그렇게 하지 말고 앞으로는 선생님에게 또는 엄마에게 와서 말해줘. 친구가 괴롭힌다고 말이야. "
" 그러면 선생님이 또는 엄마가 친구를 혼내 줄 거 에요? "
" 친구가 너를 괴롭히지 않도록 잘 말해 줄게. "
이쯤 되면 다툼 하나가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위의 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의 마음 속 상태는 그렇게 편할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각각의 아이들이 자기의 입장만을 하소연하는 상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생님 또는 부모는 두 아이의 하소연을 있는 그대로 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억울함이 있다면 억울함을 달래줍니다.
" 저런~ 정말 화가 났겠구나. 그래서 그렇게 속상한 것이구나. "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은 각각의 어린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상황에 대해 더욱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 할 것입니다. 선생님 또는 부모는 두 아이의 서로 다른 입장을 계속 들어 줄 것이고 들은 것에 대해 또한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다보면 감정과 상황이 조금씩 분리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황만을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겨납니다. 선생님 또는 부모는 각각의 아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해도 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감정이 수그러들어 마음속에 억울한 감정이 없다면 아이들 스스로도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판단은 아이들 몫입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줄 뿐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한 행동은 스스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줍니다.
정리하자면 아이들 다툼에 있어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결코 해결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아이들이 도움을 요청해 오더라도 직접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응원단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아이들 사이에서의 다툼은 늘 있는 일입니다. 늘 있는 것이지만 늘 있는 것을 그때마다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이후 삶의 모습은 실로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른들의 질서가 판을 치는 어른들의 사회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잘못에 대해 정해진 벌을 받는 것이 우리들의 사회입니다. 돈이든 자유의 구속이든 잘못에 대한 벌은 엄격하며 냉정합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살고 있는 배움의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배움의 사회는 잘못에 대한 벌보다는 경험을 통한 배움이, 실패를 통한 배움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이들이 자라 우리와 같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보다는 좀 더 살기 좋고 사람 사는 향기가 진동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어린이들이 꿈꾸는 우리가 어린이들과 함께 꿈꾸는 내일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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