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아이 함께 키우기

때리는 아이 맞는 아이

- 때리는 아이, 맞는 아이 -

 

 

맞는 아이는 몸이 아프지만

때리는 아이는 마음이 아파서 때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다 보면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다시 헤헤거리며 놀기도 하지만

게 중에는 친구들을 잘 때리는 아이도 있다.

잘 때리는 아이는 화를 쉽게 내거나 쉽게 분노하기도 하고 말보다는 늘 손, 발이 먼저 나간다.

심지어는 화가 나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하는 아이도 있다.

이런 경우 때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아이의 그런 행동을 무섭게 꾸짖거나

벌을 세우기도 하고 친구들과 떨어뜨려 앉혀 놓거나 아이와 전,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때리는 것을 용납하는 선생님들은 없겠지만 아이와 이야기를 통해 해결해 보려는 선생님들은

비교적 때린 행동보다는 때리게 된 이유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을 해소해 주려 노력한다.

그리고 때린 아이가 다소 진정이 되고 나면 제 행동을 스스로 돌아보고 그 행동에 대한 대처 행동도 스스로 결정하길 돕는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친구를 때리는 일이 생겼을 때 이에 대한 대처는

유치원마다 어린이집마다 아기스포츠단 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기관마다 조금씩 상이한 이런 대처법들의 골자는 분명 때리는 아이가 때리지 않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유아시기의 아이들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고 발산하는 시기다.

그러므로 좋고 나쁨도 분명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많다.

일반적으로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보다 더 활동적이고 때리는 아이의 대부분도 남자 아이들이다.

남자 아이들은 유아임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센 아이를 부러워하는 유아적 서열이 매겨지기도 한다.

남자 아이들의 발산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때리는 아이들의 수를 줄여줄 수 있을까?

때리는 아이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면 평상시에도 과격한 행동이 많다.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정에서 이러한 행동들을 보고 배울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어 있거나

또는 반대로 통제가 심해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유치원에 와서 푸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때리는 아이가 있는 곳에서는 평화가 자주 깨어진다.

그리고 아이들도 점차 그런 분위기와 환경에 익숙해져 간다.

쟤는 때리는 아이, 쟤는 만만한 아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을 아이 개인의 문제로 가져가는 것을 반대한다.

무엇보다 교육기관에서 반 중심의 엄마들의 모임에서 아이 하나하나를 우리의 아이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의 아이라는 관점은 '저 아이만 없다면' 이라는 생각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반 안에서 풀어가도록 만든다.

어떠한 경우이든 함께 풀기 시작하면 오해가 생기기 전에 이해가 되고 상처를 주기 전에 믿음을 준다.

 

교육은 가정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학교는 이것을 되돌려 받기 위해 마련한 사회적 공동 지역인지도 모른다.

맞는 아이는 맞아서 몸이 아프지만

때리는 아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몸까지 아프게 하고 있다.

모든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다!

 

'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그 접촉에서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은 오로지 접촉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

- '닿는 순간 행복이 된다.' 중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접촉(스킨쉽)에 대한 나름의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지금까지 아이들을 매일 품에 안으며 가슴으로 만나는 소신이 되었다.

아이가 아이를 때리는 것은 갑자기 생긴 마음의 상처나 오래 된 마음의 상처가 접촉을 통해 상처를 전이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접촉은 좋지 못한 접촉이다.

아이들이 이러한 접촉 방법을 선택하는 이유는 이러한 방법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배움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배움은 올바른 배움으로 이끌 필요가 있다.

친구를 밀거나 때린 아이와 대화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아이 감정이 들쑥날쑥하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어떤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먼저 이런 혼란스러움의 진정이 필요하다.

때로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이 아이 마음을 진정시켜 주기도 한다.

아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 아이도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는데 이럴 때 선택하는 대화의 방법이 중요하다.

미국과 독일의 과학자들이 이타심(상대의 처지를 나의 처지처럼 생각하는 마음)

생후 15개월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리고 원숭이에게서도 이타심을 나타내는 세포를 발견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타심은 인간의 숨은 본성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이타심은 배움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사회적 성격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때리는 아이에게는 이타심이 없거나 부족한 것인가.

그리고 때리는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 이러한 부분을 이해시켜 스스로 행동을 수정하도록 할 수 있을까.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그토록 많은 대화를 나누는데

 때리는 아이의 행동 수정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진전이 더디게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것에 대한 해답으로 접촉을 제시하고 싶다.

때리는 아이에게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사랑의 손길 즉 접촉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경험과 배움의 단계인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다.

책이나 교육을 통해 너무나도 배운 것이 많은 부모는 아이들에게 안정과 사랑을 전하는 이러한 접촉의 기회 대신

입으로 말하고 듣고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전하고 물들이는 과정을 더 많이 제공한 것이다.

유아 시기의 아이들은 아직 미성숙 단계이므로 대화라는 소통 창구를 통해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아이들과의 대화는 부드럽고 편안한 신체 접촉을 통한 배움이 우선되어져야 한다.

효과도 없고 서로가 피곤해지는 잔소리처럼 되풀이되는 대화보다는 부드럽고 편안한 접촉을 통한 대화가 더 필요하다.

친구를 만날 때 부드럽고 기분 좋게 접촉하는 것, 손을 잡거나 안아 주거나 쓰다듬어 주는 행복한 느낌을 몸으로 기억하게 돕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접촉을 친구 사이에서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대화가 진정 때리는 아이가 필요로 하는 대화라고 믿는다.

유아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진정성 있는 말 열 마디보다 관심과 사랑이 듬뿍 담긴 손 길 한 번, 한 번의 안아줌이 진정한 대화가 될 것이다.

 

 

왜 함께 키워야 하나?

 

함께 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함께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를 살리며 사는 것을 말한다.

 함께 있으되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경쟁사회가 꿈이 있는 사회일 수 없다.

그리고 함께 키워야 내 아이를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부모의 눈에 비친 내 아이는 부모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어 울타리 밖의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울타리를 보다 넓게 넓히기 위해 함께 키워야 한다.

앞으로 지향해야 할 교육은 서로 비교가 아닌 서로 배우는 교육이다.

 

 

1997년 일본 하마노고 소학교에서 시작된 ' 배움의 공동체 ' 운동을 아시나요?

공부와 배움의 차이는 ' 만남과 대화의 유무' 에 있습니다.

공부가 무엇과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대화도 없이 수행되는 것에 비해 배움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일과 만나 대화하는 행위이고 다른 사람의 사고나 감정과 만나 대화하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과 만나 대화하는 행위입니다.

배움을 세 가지로 나누면 활동적인 배움, 협동적인 배움, 반성적 배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교육개혁을 디자인한다/사토마나부 교수)

 

 

어떻게 키워야 하나?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배움은 서로 배움, 관계를 통한 배움이다.

서로 들어주고 서로의 도약을 위해 서로 돕고 그리고 스스로 말하는 과정이다.

 누가 누구보다 잘 났고 누가 누구보다 못났다는 것은 잘못된 기준에 따른 평가다.

 '누구보다' 잘 나기 위해서는 평생 다른 누군가를 이기려고만 해야 한다.

 누구만큼도 아니고 누구보다도 아니고 누구랑 같이 서로 돕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찾도록 도와야 한다.

유치원 또는 어린이집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이 중에서 누가 잘 났고 누가 못 났나?

이중에 소중하지 않고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있을까?

모두가 다 소중하고 특별한 아이들이다.

 어떤 아이는 힘이 세서 힘을 잘 쓰고 어떤 아이는 말을 잘 해서 말을 잘 쓰고 어떤 아이는 꾀가 많아서 꾀를 잘 쓴다.

 또 어떤 아이는 무엇을 잘 하는지 아직 몰라 친구 흉내를 내기도 한다.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아이들을 선별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라 아이들의 특성을 살려줄 수 있는 가치로 삼아야 한다.

 

상처는 메아리와 같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그것은 메아리처럼 내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서로 다른 아이들을 서로 다른 부모가 함께 키우기 위해서는 진통이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러한 과정은 상처를 내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를 더욱 굳건하게 해 주는 과정이다.

내 아이를 남의 아이처럼 바라보고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존중하면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모두 내 아이처럼 소중하고 특별한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

배움의 공동체와 같이 서로 배우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서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말하고 서로에 대해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은 자연과 친구와 나눔을 통해 배운다.

아이들은 서로 도우며 배운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의 부모이며 이런 아이들의 선생님이다.

지금도 우리는 배움의 과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