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빠학교

아빠의 역할

아버지모임을 할 때마다 아빠들에게 종종 듣는 말은 아이들과 놀기가 정말 힘들다는 말이다. 차라리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쉽다고 하니 어렵기는 어지간히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아빠들을 위해 아버지 모임을 만들었지만 아버지 모임을 찾는 아빠들도 여전히 어려워한다.

왜 그럴까?

사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말에 한 젊은 아빠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선생님은 아빠가 아니라서 그래요. "

정말 그럴까?

선생님인 내게는 별 것도 아닌 것이 아빠에게는 참으로 힘든 일인가 보다. 그렇다면 아빠도 선생님이 되면 어떨까? 그래서 아빠들을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교육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곰곰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선생님은 아이들과 노는 것이 일이고 아빠들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해답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과 정말 잘 지내는 아빠들을 발견하면서였다.

선생님이 보더라도 아이들과 정말 찰떡궁합으로 지내는 아빠들!

선생님은 이 아빠들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 아빠들은 도대체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길래 아이들과 그토록 맞을까?

역시 이 아빠들에게는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공통점이 뭘까?

나는 아이들과 생활한 지 13년이 되는 선생님이다. 아이가 없는 미혼 선생님으로 아버지 모임을 진행한지도 10년이 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빠도 아닌 선생님이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과 놀고 대화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는 아빠들도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아빠들일수록 아이들과 놀고 대화하는 것에는 전병이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놀고 대화하는 방법을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 방법이란?

 

왜 아빠가 아이와 놀아줘야 해요?

적어도 우리 어린 시절에는 안 그랬다. 어디 아빠들이 놀아주는가!

아빠는 아빠고 아이는 아이였다. 아니 아빠들이 놀아주지 않아도 심심할 틈이 없었다. 동네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었고 친구들이 없으면 집으로 가서 불러내면 되었다. 집에도 없으면 형, 누나, 동생하고 놀았고 그것도 안 되면 혼자서 놀아도 재미있었다. 놀이터, 장난감이 많지 않아도 할 놀이는 셀 수 없었다. 공터만 있으면 되었고 공터가 없으면 골목이나 사람들 지나는 길만 있어도 되었다. 적어도 우리 어린 시절에는 아이들은 마음껏 놀았고 노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놀이터, 장난감은 수도 없이 많이 생겼지만 정작 필요한 친구들이 없다. 놀이터에 아이들 냄새가 흔하지 않다. 골목놀이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형제, 자매가 많은 것도 아니기에 놀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은 친구들이 있는 유치원에 가야하고 학원에 가야 한다. 그리고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동안 몇 안 되는 놀이 속에서 친구와 놀잇감으로 경쟁하며 그렇게 놀아야 한다. 그렇다보니 아이들은 자연스레 스스로 노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정해진 장소가 아니면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누군가 놀아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빠들이 아이들과 놀아줘야 할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빠들이 놀아주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놀 줄 알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아빠가 되어 스스로 놀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노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놀아줘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아빠인 내 자리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요즘 아빠들은 한마디로 말해 참 불쌍한 시대의 아빠들이다. 지금의 아빠들이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아빠들은 한마디로 말해 집안 권위의 상징이었다. 가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지금의 아빠들은 절대 그렇게 살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그랬다간 집안에서 소위 말하는 왕따가 되기 십상이다.

어디 그 뿐인가?

예전에는 집안일은 엄마가 바깥일은 아빠가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안과 밖이 따로 없다. 바깥일을 하는 아빠도 집안일을 나눠 맡아야 하고 핵가족과 맞벌이로 인해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도 엄마, 아빠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즘 아빠들의 고집이 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하더라도 아이들 교육만큼은 엄마가 했으면 하는. 그래서 아빠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 싸움을 바라보는 입장도 아빠들은 좋게 말해 엄마보다 너그럽다. 아이들은 다 그렇게 큰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요즘 아빠들이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빠지는 함정이다.

아빠들도 아이들에 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밖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집안에서는 가족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만다. 에이~ 설마! 하다가는 말이 곧 씨가 되어 버리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아빠인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빠들은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아빠와 함께 한 기억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생각도 하도 빨라서 조금만 자라도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을 시큰둥해한다. 이 말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아빠들도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아빠를 찾을 때 아빠는 아이 곁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 아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

아빠들과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 몇 년 동안은 요즘 아빠들이 참 너그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렇게 이해심이 많고 어쩌면 그렇게 넓은 품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빠들과 보다 가까워지면서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사실 아빠들은 아이들을 이해하고 엄마들보다 보다 넓은 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꼭 전쟁에서만 쓰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내 아이랑 잘 놀고 대화를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도 내 아이를 충분히 잘 알아야 한다. 아이에 대한 정보가 없이는 아이와 1시간을 버티기가 힘들 것이다.

아이가 아빠와 놀 때 아빠에게 대가성 물건을 바랄 때가 많다고 호소하는 아빠들도 있는데 아이들이 이런 바람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빠의 잘못이다. 양적으로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적은 아빠이기에 질적으로 짧은 시간동안 많은 성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나머지 짧은 시간에 돈을 들여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 한 결과이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보다 좋은 음식과 먹을거리를 먹이기 위해 연일 아이들과 씨름하는 반면 아빠는 이러한 엄마의 철칙을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처참하게 무시해 버릴 때가 있는 것이다. 퇴근 시간 항상 아이들이 먹을 과자를 사 가는 아빠 또는 오랜만에 쉬는 일요일, 아이의 혼을 빼 놓는 장난감이나 놀잇감을 제공하는 아빠가 이런 아빠들이다. 아빠의 이러한 행동은 아이들이 엄마와 아빠를 비교하게 만들고 눈치껏 엄마, 아빠를 이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효과를 얻기 위해 아이의 환심을 사는 아빠들은 엄마와의 비교에서는 이겼지만 결국 다른 비교에서는 비참한 패배를 얻게 된다.

실 예로 매일 과자를 사 가던 아빠가 과자를 사 가지 않는 날은 아이들이 극도로 실망한 모습을 보인다. 아빠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할 뿐만 아니라 투덜거리고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아빠의 화를 끌어올릴 수 있는 충분한 모습이다. 아빠 스스로에게는 아빠와 과자가 비교된 것 같고 그 비교에서 비참하게 과자에게 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빠보다 과자가 더 중요해!"

급기야 이렇게 화를 내고 나면 이 일은 더 이상 수습하기에는 먼 길을 달리고 있게 된다. 결국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용했던 것들에 의해 아이들과의 관계가 오히려 더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적다하더라도 그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 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그 시간동안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멋진 아빠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사실 아이들이랑 지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아이들이 아빠에게 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바람도 아니다. 단지 노는 동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기를 바랄 뿐이다. 아빠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내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을. 그러므로 내 아이의 환심을 어떻게 살지를 궁리하지 말고 내 아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내 아이가 진정 어떠한 아이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엄마나 아이의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아빠들에게는 이러한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들의 모임과 아빠들의 모임을 진행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다른 점 한 가지가 있다. 엄마들은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이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데 반해 아빠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가장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아빠들의 모습을 '아빠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라고 표현한다. '아빠들의 어깨'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이들과 아내를 보호하고 보살핀다는 의미에서의 어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군가 아빠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중심의 가정에서 살아온 과정이 있기 때문에 저절로 몸에 배이게 된 것이다. 형제가 여럿 있는 집안의 장남은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아빠들의 어깨는 이렇듯 책임감의 어깨이므로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단호함과 단단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절로 지게 된 것은 아니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지고 있는 이러한 책임감의 어깨는 쉽게 덜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딱하고 무거울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역사를 거듭하면서 아빠들의 어깨도 변해야 하는 것이다. 어깨는 어깨이되 보다 부드럽고 유연한 어깨가 되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아빠들은 가정 안에서 보다 편안할 필요가 있고 편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가족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이에 대해 알려고 할 때 기본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있다.

내 아이가 어떤 아이였으면 하는 바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내 자식은 나의 장점은 닮고 단점은 닮지 않기를 은연중 바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은 닮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더 닮는다. 부모로서는 참으로 속 터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고치기 위해 자꾸만 야단치고 윽박지른다면 오히려 장점마저도 점점 잃게 될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아이가 가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 아이가 다소 산만하거나 어수선하여도, 소심하여 자기 생각을 말하기까지 참 많은 인내가 필요하더라도 그것이 내 아이의 모습이다 생각하고 그 모습에서부터 출발하면 된다. 그러면 부모는 더 이상 내 아이의 모습에서 단점만을 찾아 고치려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럴 때에 비로소 아이들은 제 모습에서 장점을 찾아 단점을 보완해 나가는 교정 작업을 스스로 시작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준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부모로서 자식을 대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부모의 인정이야말로 아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부모의 모습이다.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가운데 내 아이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져보자. 내 아이가 다니고 있는 놀이방이나 유치원 이름은 무엇이며 내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와 반 그리고 내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는 누구누구인지, 내 아이가 왜 그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내 아이의 식습관이나 버릇,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자는 모습은 어떠한지, 어떠할 때 화를 내고 어떠할 때 가장 기뻐하는지 등 생활 속의 모습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아빠의 모습은 집요하게 캐고 묻는 수사관이나 탐정의 모습이 아니라 한 여인을 사랑하는 젊은 남자가 그 여인에게 가지게 되는 관심처럼 조심스럽고 달콤하게 다가서자. 수사관이나 탐정은 알면 알수록 꼬투리를 잡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는 알면 알수록 여인의 매력에 푹 빠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충분히 ◯◯ 하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있어 성장의 과정이란 배움의 과정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배움은 다양한 경험들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아이들은 이러한 다양한 경험을 몸의 움직임을 통한 체험과 어른들의 모습에서 따 온 열매들 그리고 책을 통한 약간의 지식으로 나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즐거움과 편안함 그리고 자발성이다.

잠깐 이 대목에서 어린아이들의 놀이에 대해서도 한 번 짚어보자. 놀이는 즐겁게 놀기 위해 자발적으로 행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잘 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노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노는 과정에는 놀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이들과 놀이의 관계의 중요성을 주장한 어떤 학자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가운데 놀이가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준다하였으며 놀이에서는 움직임 자체가 바로 목표라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놀이에 대한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주는데 이때 보여주는 집중력과 인내는 이후 학습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 충분히 노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며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 놀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나 교사의 보호를 받는다. 이러한 보호는 스스로 가치관을 정립 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보호를 말한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노는 일에 있어서도 어른의 보호를 받는다. '놀기'는 문법상의 의미로 동사이며, 스스로 하는 자동사이기에 스스로 하지 못하는 놀이는 놀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스스로 하는 놀이에 대한 보호는 보호가 아닌 간섭이지 않을까?

이러한 간섭은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자유롭게 놀도록 절대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른 부모들이 안 그렇고 그 부모의 아이들이 안 그렇기에 나도 내 아이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왠지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마음대로 놀도록 내버려만 두면 큰일 날 것만 같고 그래서 뭐라도 가르치고 시키고 통제하려 한다. 세 살, 네 살 심지어는 간난 아이 때부터 시간표를 만들어주고 엄마의 시간표에 따라 척척 움직인다.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부모 마음에 들게 놀아야 한다. 더욱이 핵가족화로 형제, 자매도 없는 아이들이 많아 이러한 통제는 더욱 집중되기 일쑤다. 그 뿐인가 맞벌이하는 부부의 자녀들은 온종일 시간표에 갇혀 살아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이들은 자연스레 통제에 익숙해지고 만들어진 놀이, 정형화된 놀잇감으로 혼자서 또는 시간표 속에서 놀게 되어 스스로 노는 법을 서서히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에 노는 것에 꼭 필요한 자발성과 재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마치 어린이 나라에 어린이가 사라진 것처럼.

충분히 놀지 못한 아이는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고,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아이는 충분히 건강한 어른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적당한 때가 있기 나름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지금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재미있게 놀아야 할 때이다.

 

아빠에게 쉼이란?

아버지 모임에 오시는 아빠들에게 물었다.

쉼이 무엇이냐고!

아빠들은 머뭇거림 없이 말했다. 휴일 날 아이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집에서 마음 편히 텔레비전 실컷 보고 잠도 자고 싶은 만큼 자는 것이라고. 휴일은 그렇다 치고 평일은 어떠냐고 물었다. 평일은 다행히 일찍 들어가는 날이 별로 없을뿐더러 늦게 들어가면 아이들은 이미 자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 얼굴 한 번 보고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보는 것이라고. 물론 아내도 이런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진정한 쉼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런 아빠들의 대답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쉼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았는데 쉼의 방법이 바뀌고 있고 쉼을 바라보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 휴일 날 마음 편히 눈치 보지 않고 늦잠을 잘 수도 없을뿐더러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가족들 등살에 밀릴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일찌감치 마음을 비우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집안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나만의 시간 즉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이러한 내 모습에서 잠시 빠져 나와 보자. 그리고 내가 바라는 쉼이라는 것! 그것이 진정 내게 쉼이 되는 방법인지를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짚어보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 내게 쉼일까! 이런 쉼을 보내고 나면 내 몸이 내 마음이 재충전되어 다음날 아침에는 새로 태어난 듯 상쾌할까? 지금껏 살아오면서 베이게 된 생활습관에서 만들어진 잘못된 쉼의 방법은 아닐까? 진정 내 몸이 원하는 쉼은 내가 원하는 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자. 그래서 진정 내 몸에 맞는 쉼의 방법을 익히도록 노력해 보자. 그럴 때에야 비로소 내 몸은 온전한 쉼을 통해 재충전이 될 것이고 이러한 충전으로 인해 내 일에 내 가족에 보다 능동적인 아빠가 될 것이다.

 

능동적인 아빠가 되는 것, 내 아이에게 바람을 가지지 않는 것,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아이에 대해 아는 것, 내 아이가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것 그리고 엄마에게 아빠의 역할까지 맡기지 않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문자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하지만 문자로 살 수는 없는 법!

 

아버지라는 이름은 내 아이가 부르는 이름이듯이 좋은 아버지라는 이름도 그렇다.

좋은 아버지란 내 아이의 좋은 아버지다.

잊어서는 안 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