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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의 일기(녹음본)

우울함이 끝나는 날 / 선생님이 아파요

 

 

조그마한 동네입니다.

꼬마가 있습니다.

 

길을 갑니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꼬마는 장님입니다.

모두가 장님입니다.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보인다는 말을 모릅니다.

무엇이 보이는것인지 생각도 모릅니다.

지팡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팡이가 길을 갑니다.

 

길을 갑니다.

걸어서 갑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희미한 기억 저편에 있는 말입니다.

 

걷는다는 것.

누군가가 말해 주었습니다.

걷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걷는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지금 꼬마는 걷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없는것도 몰랐습니다.

누군가가 말해 주었습니다.

바람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햇볕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위험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모든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바람을 느끼고 싶습니다.

햇볕을 받고 싶습니다.

위험은 피해가야 합니다.

 

모든것을 알면서부터

고통이 생겨났습니다.

 

조그만 마을이 있습니다.

우울한 마을입니다.

꼬마가 있습니다.

우울한 꼬마입니다.

우울함이 끝나는 날

우울함이 시작됩니다.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돌이키려 해도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억지로 잊지 않습니다.

억지로 돌이키지 않습니다.

 

이미 채워진 곳에 다른것을 채웁니다.

 

조그만 마을이 있습니다.

우울한 마을입니다.

꼬마가 있습니다.

우울한 꼬마입니다.

우울함이 끝나는 날..

지팡이를 인정하는 시작입니다.

 

꼬마가 길을 갑니다.

 

선생님이 아파요

 

무엇에 놀라 잠을 깼습니다.

쿵쿵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선생님이 오셨나 봅니다.

오전 730..

 

현관문을 엽니다.

아침공기에 잠이 쫓겨 달아납니다.

담배를 집어 듭니다.

머리가 무겁습니다.

 

오늘은 쓰레기 치우는 날..

담배를 입에 물고 쓰레기 봉지를 낚아 챕니다.

현관문에 비친 꼴이 꼭 채석장 아저씨 같습니다.

 

팔에 힘이 없습니다.

다리를 접니다.

이유없이 힘을 잃었습니다.

아무생각도 없었는데..

오늘 아침은 왠지 이상합니다.

 

힐끗 힐끗

자꾸만 눈이 갑니다.

제 모습이 여기저기 담겨 있습니다.

현관문에도, 커다란 베란다 창에도

심지어 주차장 한귀퉁이에 고인 물에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힘이 없습니다.

무엇이랄것도 없이 우울합니다.

누구랄것도 없이 자신입니다.

오늘은 희망이의 하늘이 없습니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아이들이 뛰어 갑니다.

가방도 내려놓기전에 블럭미며, 자동차며

작은 손에 커다란 장난감들이 그득 그득합니다.

 

수업시간입니다.

오늘따라 아이들 목소리가 크게 들려 옵니다.

오늘따라 제 목소리가 하염없이 작습니다.

아이들을 부르지를 못합니다.

손짓도 할 수 없습니다.

 

점심시간..

밥통을 꽂는것을 잊었습니다.

아이들이 밥달라고 성화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날때까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양을 따라

희망이의 생각 또한 갈라져 버립니다.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다시금 맞이한 수업시간..

나도 모르게 졸았습니다.

눈을 뜬채 정신을 잃었습니다.

흠짓 놀랐습니다.

분무기를 얼굴에 뿌립니다.

정신이 듭니다.

세수를 합니다.

몇번을 했는지 모릅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물

세면대를 의지한 팔이 흔들거립니다.

오늘은 수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혼자서 무엇을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무것도 한게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가만히 쳐다보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제 자신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정신마져 없습니다.

 

시간이 어찌갔나 모르겠습니다.

새벽 한시..

컴퓨터 앞에 앉아 중얼거립니다.

 

오늘은..

희망이가 나락에 떨어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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