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중과 배려
세상이 참 각박합니다. 매스컴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자면 세상이 무서워 아이를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어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집 안에만 가둬둘 수도 없는 일... 부모 입장에서는 한 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제 몸을 지킬 수 있다면 모를까... 세상이 이렇다 보니 성(性)은 더욱 안으로 숨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스갯소리 하나 하겠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남자 선생님으로 유치원 선생님이 된지 한 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아이들과 땀 흘리며 뒹굴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지 몇 달이 되지 않은 어느 날 여자 아이 학부모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와의 스킨십을 하지 말아 달라는 전화였습니다. 남자 선생님이 여자 아이와 스킨십을 하는 것이 못내 불안하셨던 모양이었습니다. 학부모로부터 직접 받은 전화라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문제는 그 후 부터였습니다. 스킨십을 누구는 하고 누구는 하지 않자 스킨십을 해 주지 않는 어린이는 선생님이 자기만 미워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말로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을 해 줘도 아이는 납득하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후 다시 학부모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스킨십을 해 주되 해야 될 스킨십과 하지 말아야 될 스킨십을 알려주는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하는 학부모님이나 전화를 받는 선생님이나 참으로 난감한 통화였습니다.
스킨십(skinship)이라는 말은 일본식 영어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피부교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피부의 상호접촉을 통한 애정의 교감이라 할 수 있는데 선생님은 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손을 잡거나 얼굴을 비비거나 뽀뽀를 하거나 안아주는 스킨십을 합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매달리거나 무릎에 앉거나 등에 업히거나 안아달라는 요청을 많이 합니다. 이러한 스킨십에 있어 중요한 원칙 하나는 상대가 스킨십을 좋아하더라도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원칙 안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性)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도 존중과 배려입니다.
어린이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입니다.
나는 좋더라도 상대가 싫어하면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존중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돕고 보살피는 것이 배려입니다.
세상이 너무 각박하다보니 내 것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실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것만을 너무 내세우다보면 남의 것은 그만큼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소중하듯 남의 것도 소중합니다. 남의 것을 함부로 여기면 남도 내 것을 함부로 여기게 됩니다. 서로 소중한 것을 지켜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존중입니다.
존중은 약속이며 원칙입니다. 지켜지지 않을 때 서로가 상처를 받습니다.
하지만 배려는 좀 다릅니다. 배려는 선택입니다. 존중하지 않는다 하여 나무랄 수는 있어도 배려하지 않는다 하여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배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중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마음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배려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성(性)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남을 존중하는 마음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性)은 누구에게나 있어 소중하고 특별하며 고귀한 것입니다.
2. 남(男) 과 여(女)
동양에서는 세상을 음과 양으로 양분하여 이해합니다. 그만큼 음양(陰陽)은 세상을 대변하는 서로 다른 존재이기도 합니다. 또한 음양(陰陽)은 남녀의 성(性)에 관한 이치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간에는 음양(陰陽)이 조화를 이룰 때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룬다고 합니다. 음과 양은 양극화할 정도로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것이 어울렸을 때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낮과 밤도 그렇고 동전의 양면도 그렇고 위와 아래도 그렇습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낮이 더욱 환합니다. 동전은 한 면만 없어도 동전이 될 수 없습니다. 위가 없이는 아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여자가 있어서 이고 여자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남자가 있어서입니다. 서로 다른 만큼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아이들과 남자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남자는 힘도 세고 달리기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한다고 합니다. 여자는 요리도 잘 하고 청소도 잘 하고 예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못 살게 굴고 담배도 피고 술도 먹고 나쁜 짓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여자는 소리를 잘 지르고 잘 꼬집고 잘 삐지고 잘 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이 싫다고 합니다. 여자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다른 이유로 생기는 불만안에는 나름의 편견이 있습니다. 이러한 편견을 바로 잡아야만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바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편견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누가 이 조그마한 녀석들에게 이러한 편견을 심어줬을까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남자, 여자의 역할에 대한 편견뿐 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성별이 없는 색깔에 까지 깔려 있습니다. 남자 아이들을 대표하는 색은 파란색, 여자 아이들을 대표하는 색은 빨간 계통의 분홍이라 할 정도입니다. 남자 아이들이 파란색을 좋아하고 여자 아이들이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편견이 아닙니다. 남자 아이들이 분홍을 좋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두고 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색을 좋아한다고 '여자'라고 놀리는 것이 편견입니다. 또는 이러한 색의 옷을 그래서 입지 않으려는 아이들의 생각이 곧 편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편견이 꼭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편견일까요?
편견이란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합니다. 동전의 앞면이나 뒷면 중 한 쪽 만을 보고 동전을 말할 수 있을까요? 편견은 이렇듯 전체를 보지 못함에서 생깁니다. 아이들이 말하는 남자에 대한 생각, 여자에 대한 생각은 아이들 나름의 경험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이러한 경험에 동전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더해주는 것이 편견을 만들지 않는 방법입니다.
기질(氣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력과 체질을 합한 말입니다. 기력(氣力)은 사람의 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신과 육체의 힘을 말하며 체질(體質)은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몸의 생리적 성질이나 건강상의 특질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기질은 타고난 몸바탕을 가지고 활동하는 정신과 육체의 힘을 말하는 것인데, 남자 아이들이 총과 칼 놀이를 좋아하고 여자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기질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질은 기질일 뿐입니다. 기질이 이렇다 하여 다른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자신이 타고난 기질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기질에 대한 다양한 경험도 필요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름을 아이들이 편견 없이 알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말하는 편견은 단순히 역할에 대한 편견일 때가 많습니다. 역할이란 서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아빠가 집안일을 하고 엄마가 바깥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며 아빠가 옷을 꿰매고 엄마가 망치질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역할에 대한 공정관념이 생기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편견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서로 상생함을 배우는 것이 곧 자연의 이치를 배우는 길입니다.
3. 화장실에서 존중을 배우자
풀씨 학교 화장실은 남, 녀 어린이들이 함께 사용하는 화장실입니다. 하지만 소변기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남자 어린이는 입식 소변기에서 여자 어린이는 좌식 소변기에서 소변을 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 남자 어린이들 소변기는 그야말로 자연에서 소변을 보는 격이었습니다. 여자 어린이들이 소변을 보러 갈라치면 남자 어린이들의 엉덩이를 꼭 보고 지나가야 할 판이었습니다. 남자 어린이들이 함께 사용하는 소변기가 화장실 입구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고 남자 어린이들은 바지와 속옷을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 소변을 보기 때문에 여자 어린이들이 보고 싶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남자 어린이들이 궁금한 여자 어린이들은 남자 어린이들이 소변보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양은 여자 어린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화장실마다 문이 달려 있어도 여자 어린이들도 문을 닫지 않고 소변을 볼 때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곧 소변을 보는 모양을 보이는 것이 어린이들에게는 성(性)적인 수치심을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음의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 어린이들이 소변보는 것을 여자 어린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든지 여자 어린이들이 소변보는 것을 남자 어린이들이 문을 넘어 바라보면 남자 어린이건 여자 어린이건 선생님에게 달려와 불쾌함을 전합니다.
선생님에게는 참 난감한 일입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평상시 소변보는 모습은 지나치며 봐도 그만이고 안 봐도 그만이지만 이렇게 마음잡고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여기서 배움 하나를 얻습니다.
소변보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여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존중의 참 뜻을 배웁니다. 옛 우리 조상들은 우리 집을 지키기 위해 집 담장을 높이 세우지도 않았고 현관문도 지금처럼 이중삼중으로 잠그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존중이 있었던 까닭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네 아이들이 사는 학교에도 이와 같은 존중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성(性)이라는 것은 스스로 지키기도 하는 것이지만 다른 이들로부터도 존중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중이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지키기에 더욱 힘을 쓰게 되어 더욱 폐쇄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을 벗어난 바깥세상은 이러한 존중이 땅에 떨어질 만큼 떨어져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배움을 가지는 학교에서만큼은 서로에 대한 이러한 존중과 신뢰가 마지막까지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자유롭게 화장실을 드나드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남, 녀 어린이들이 서로에게 구애받지 않고 소변을 보고 손을 씻고 심지어 큰 볼일을 보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아이들 마음속에 성(性)적인 수치심이 생기기 전에 자유로움이 먼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점차 나이가 들어감에 화장실 문은 자연스럽게 닫히겠지만 이러한 과정이 남을 믿지 못해서가 아닌 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서 스스로 문을 닫는 과정이 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사회가 참 시끄럽습니다. 이미 성(性)에 대한 이야기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운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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