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가 다툽니다.
한 녀석이 다른 녀석 장난감을 가져갔다고.
장난감은 하나인데 가지고 놀고 싶은 아이들은 둘입니다.
아이들도 압니다.
함께 가지고 놀던지
아니면 둘 중 하나가 가지고 놀아야 한다는 것을.
웬만하면 둘 다 장난감을 포기하는 일은 드문 일입니다.
선생님은 재판관이 아닙니다.
재판관이 아니기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해서는 안 됩니다.
결정은 아이들이 해야 합니다.
두 녀석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녀석 이야기를 먼저 듣느냐는 것부터
아이들은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그래서 그것도 아이들이 정하도록 합니다.
두 녀석 사이에 끼어들 때는 어느 녀석 편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결정한 대로
한 녀석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 한 녀석 이야기도 듣습니다.
그리고 한 녀석에게 나머지 한 녀석의 입장을 이야기 해주고
나머지 한 녀석에게도 먼저 이야기한 녀석의 입장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는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지.
아이들은 서로 양보할 마음이 없습니다.
장난감을 먼저 가지고 놀던 녀석은
나중에 온 녀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온 녀석은 장난감을 독차지하려는 녀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두 녀석을 같은 마음으로 같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러쿵저러쿵 사연을 달지도 않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만든 장난감에 대한 규칙이 정해져있다면
그 규칙대로 하면 됩니다.
또는 아이들이 장난감에 대한 규칙을 정해야한다면
함께 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이라면
아이들이 판단할 동안 기다려줘야 합니다.
가끔씩 한 녀석이 포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녀석이 장난감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포기가 자연스럽게 일어난 아이의 반응이라면
이러한 반응에 대한 선생님의 반응은
그 아이의 포기를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장난감을 포기한 아이의 모습을
포기한 아이의 마음에서 절로 생겨난 ‘양보’라는 이름으로
다른 아이들의 귓가에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포기한 아이도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고
포기하지 않은 아이도
포기한 아이의 모습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 녀석이 아닌 다른 녀석들도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생겨난 이름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두 녀석 모두 끝까지 장난감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러한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장난감으로 인해 다른 상황 즉, 투닥투닥 싸움이 되지 않도록
선생님이 두 아이를 보호해주고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두 아이가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장난감이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줘야 합니다.
선생님이 장난감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인 선생님이 두 아이로부터 장난감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지켜준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결국 문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이 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른인 선생님이 기다려줄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선생님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됩니다.
좋은 경험은 비슷한 상황에 적절히 활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의 경우입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다를 것이 없다 생각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른들은
이러한 것을 아이들보다 더 잘 알면서도
더 잘 알아서인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해매이다 관계마저 일그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의 선생님일 때는 힘든 줄 몰랐습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것이 곧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의 선생님인 지금은
옳은 것도 옳지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그른 것이 좋은 관계를 낳기도 합니다.
어른들의 세계는 왜 이리 복잡하고 어지러울까요?
왜 내 안에 다른 이를 받아들이기가
두 팔 벌려 안아주는 것만큼 쉽다가도
바늘구멍에 낙타를 집어넣는 것 마냥 말도 안 되는 일이 되기도 할까요?
분명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는 것인데
어렸을 때는 존재했다가
어른이 되면 거짓이 되는 산타 할아버지와 같이
어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마법이 있는 걸까요?
아이들 가슴은 푹신푹신 스펀지와 같아서
누군가 쿡- 찔러도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어른들 가슴은 금방 바른 콘크리트 시멘트라
한 번 누르면 영영 그 모양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네 아이들은 어른 되는 것에 결코 희망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피터 팬 마냥 영영 어린이로 살고 싶어 할 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이야기를 쓰기는 참으로 쉬웠는데
어른들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의 문제일까요?
어찌되었든 이제는
어른들 이야기도 써 볼까 합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어릴 적 그 마음이
어른이 된 지금의 마음과 결코 다른 마음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입니다.